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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솔 Apr 24. 2024

<소년이 온다>

2024 낫저스트북클럽 5월의 책

적성에 맞지 않던 회사를 꾸역꾸역 2년 동안 다니다 미련 없이 그만둔 후,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유학을 준비하던 친구와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진짜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친구 따라 유학 박람회를 다니며 상담자가 권하는 대로 원서도 넣어보고 했던 것이 덜컥 합격을 하고 말았습니다. 육 개월 뒤엔 영국 북부의 작은 도시에 있었습니다. 경비를 줄이려고 개강 직전에야 갔기 때문에 적응할 틈도 없이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인 교수와 동급생들 틈바구니에서 강의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었고 어느새 첫 학기 소논문을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대학원도 처음인 데다 영국이라 선배도 없고 물을 데도 없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한국에서 건축학부시절 했던 대로 적당한 대지를 골라 조사하고 작고 예쁜 집을 설계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공간에 대한 에세이와 함께 제출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단 한 번의 낙방으로도 학교를 떠나야 했는데, 커트라인에서 딱 1점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을 새도 없이 다음 학기가 바로 시작되었는데, 두 번째 학기부터는 본격적인 석사 논문 준비를 겸하기 때문에 매주 담당 지도교수 면담 시간이 있었습니다. 일대일로는 처음 마주한 지도교수 머샤는 사실 나는 첫 학기에 낙방했어야 했다고, 그런데 에세이와 함께 제출한 모형이 매우 정성스러워 열심히 하는 학생인 것 같으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줘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겨우 패스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와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차근차근 물었습니다. 이유나 목표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유학을 왔고, 해외 석사 학위 하나정도 있으면 자국에서 취업하는 데 조금 더 유리할 것 같았고, 진로도 바꾸고 싶었던 차에 취업 가능성이 조금 더 넓은 분야로 공부하면 되겠다 싶었던 건데 차마 그대로는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습니다. 머샤는 논문 주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마냥 예쁜 집을 디자인하고 내가 왜 이 집이 예쁘다고 생각하는지 적어내는 것으로는 학위를 받을 수 없을 거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보탰습니다. “Start with the grand issue.”


진짜 중요한 문제에서 시작하라는 말 - 그 뒤로의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한 마디였습니다. 우선은 공부의 방향과 넓이와 깊이부터 바뀌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란 뭘까 고민하다 당시 즐겨 보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쓰레기 수출을 하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검색만으로 쓰레기 동산에서 돈이 될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아이들의 생활, 끝이 없어 보이는 가난의 악순환, 그 모든 것을 만든 부의 양극화와 소비지상주의 - 모르고 살던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편협한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뒤섞여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쪼개 조사하고 공부했습니다. 어쩌면 외면했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를 찾아 나름의 해결안과 함께 논문을 완성했고 무사히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달의 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하는 이유는, 책방을 열고 좋은 책을 찾는 눈을 키우는 동안 스스로에게 그리고 작가를 꿈꾸며 글을 보여주었던 많은 인연들에게 늘 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던 독립출판 작가에게도, 좋은 책이란 무엇이냐 물어오던 인터뷰어들에게도, 그리고 매달 낫저스트북스의 이름을 내건 ‘이달의 책’을 고를 때에도 -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져 읽히고 남겨질만한 중요한 이야기인가 하는, 그리하여 세상에 나온 그 책은 그냥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


소설가 한강은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유명한 작가이고, <소년이 온다>를 읽지 않았어도 이 책이 44년 전 5월의 광주를 쓴 소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다시금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잘 알려진 책을 낫저스트북클럽 선정 도서로 추천하는 바는, 때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갈피가 필요한 당신에게 한 권의 책으로 건네는 나의 대답입니다. 어쩌면 외면했기에 몰랐던 이야기, 늦게라도 알도록 오래오래 전해질 책을 쓴 소설가, 그리고 그 모든 커다란 문제들 속에 존재하는 개인, 고유한 생명들.


“Start with the grand issue.”



책 읽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낫저스트북클럽, 2024년 5월의 책

한강의 <소년이 온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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