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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Apr 15. 2021

다큐멘터리 시리즈 <도시인처럼>을 봤습니다.

누군가 개인주의자를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프랜 리보위츠를 보게 하라.

  

 해외여행을 몇 번 경험했지만, 나는 미국을 가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니, 미국 빼고 전 세계를 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시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유럽여행은 계획이라도 짰지만, 미국은 가야 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일단 한국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값이 너무너무 비싸다. 뉴욕행 왕복비행기표 값이면, 2주 동안 동남아 여행을 갈 수 있는 돈이다. 



 그 다음으로, 뉴욕에 대한 강렬한 로망이 내게 없다. 가서 얻거나 배울 게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허드슨 강이나 자유의 여신상은 랜드마크이긴 하지만, 비싼 비행기삯을 저울에 놓으면 수지가 맞지 않다. 뉴욕현대미술관과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은 꽤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현대미술관을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 곳이 꼭 뉴욕이어야 할 정도로 현대미술을 구별할 심미안이 내게는 없다. 뮤지컬도 진짜 유명한 게 아니면 잘 모른다. 게다가 뮤지컬 좌석값을 잊을 만큼 뮤지컬에 빠져 있지도 않다. 그러나 뉴욕여행은 계산기를 두드려서 하는 결정이 아니다. <도시인처럼>의 프랜 리보위츠가 말했듯이, “뉴욕에 오는 이유는 뉴욕 때문이다.” 뉴욕 그 자체가 이유다. 



 여기서 프랜 리보위츠가 말한 “뉴욕”이란 ‘자신의 고향에 두고 떠난 곳’을 의미한다. 그녀가  뉴욕에 처음 왔던 70년대에는 동성애자가 떳떳하게 다닐 수 있는 도시는 뉴욕 뿐이었다. 그런 자유와 교류의 공간, 뉴욕은 70년대에 ‘효율성’ 문제를 맞닥뜨린다. 도시환경은 더러워지고, 위험해진다. 일반적인 해결방법은 주민들의 세금을 알뜰살뜰 쓰는 예산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은 방법을 바깥에서 찾았다. 관광객을 불러오기 위해 도시 이미지를 만들고 홍보하는 것이다. 뉴욕 시청은 프랜 리보위츠가 말한 “뉴욕”과 다른 뉴욕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덮어그린다. 이것이 도시 마케팅의 시초다. 


뉴욕의 도시마케팅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I love NY" 로고다.


 알다시피, 관광객에게 홍보하기 위한 뉴욕 마케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뉴욕은 메트로폴리탄의 상징으로 미국을 넘어 지구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40년 넘게 뉴욕에서 살아온 찐 뉴요커 프랜은 마케팅된 뉴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타임스퀘어는 최악의 건물이고, 지하철역은 매번 공사나 하지 않나…  대체 내가 낸 세금으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프랜의 날카로운 일침은 듣고 보면, 뉴욕 뿐 아닌 대도시가 공유하는 문제들이다.



 뉴욕의 성공 사례 덕분인지 대도시들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이 관광객에게 통할 지는 몰라도,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확실히 통하지 않는다. 수십억 혹은 수백억을 들여 만드는 의미없는 랜드마크들을 보며 행복해 하는 주민들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봐, 뉴욕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말이야! 도시인 것처럼 굴자고(Pretend it’s a City)!” <도시인처럼>은 뉴욕에 오래 사는 사람만이 하는 이야기면서도 뉴욕을 모르는 대다수 도시 속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시인처럼>은 7부작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로 각 에피소드마다 주제가 다양하다. 날카로운 비판과 매콤한 유머감각을 지닌 프랜 리보위츠와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인터뷰와 대담들은 재능, 대중교통, 돈, 영화, 책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각각 떨어져 있는 주제들을 꼼꼼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나는 프랜 리보위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반복되는 <도시인처럼>의 뉘앙스를 단어로 잡고 싶었다.



  4화 정도 지났을 때, 이런 생각이 스쳤다. ‘프랜 리보위츠, 이 사람은 “개인주의자”구나’. 그녀가 까칠해서 개인주의자라는 건 아니다. 확실히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단순한 이기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해보자. 각자 살기 위해 남의 것을 훔치고, 그 훔친 것을 또 훔치는, 세상은 말 그대로 ‘콘크리트 정글(Concrete Jungle)’이 될 것이다.


<Empire State Of Mind> 만큼 흥행한 도시의 찬가가 있을까?


 토마스 홉스는 이런 ‘콘크리트 정글’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썼다. 서로 자신의 것을 지키고 남의 것을 뺏기 위해, 끝없이 싸우고 경계하고 잠도 안 자는 세상이다. 그럼 오래 못 산다. 누군가가 나서서 전쟁 같은 상황을 끝내고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일부 대리인에게 넘기자고 제안한다. 이것을 리바이어던, 국가라고 부른다. 



 ‘콘크리트 정글’ 속 개인들은 각자의 편의를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불편함과 피로감으로 돌아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유와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좋고, 사람들에게도 좋다는 최선의 결론을 내린다. “개인주의자”는 사회가 없어선 안 되는 필요악임을 안다. 그래서인지 프랜은 "개인주의자"로서, 시민으로서 불평도 비판도 많다. 




 “개인주의자”의 미덕은 개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있다. 프랜은 자신의 의견을 막힘없이 개진하고, 타인의 의견에 대해 반대도 하지만, 타인의 감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고립되어 있지 않다. 프랜은 “미래 세대야 내가 알 게 뭡니까, 어차피 그 때 되면 죽었을 건데!”라고 말하면서, “내 세대와 다른 세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이패드가 당연한 것일 겁니다.”라고 말한다. 프랜은 세대와 세대 사이의 진정한 공감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나는 그 "거리감"이 그녀의 “개인주의”를 근본적으로 떠받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소멸하고 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거리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점점 견디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은 나와 의견이 같아야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은 '비판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차단한다. 예전부터 모두가 똑같은 의견을 지닌 세상 따위는 없다. 올바르거나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생각을 교류하는 생산적 논쟁으로 합의를 형성한다. 사회계약론 속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는 이렇게 움직인다.



 반대로 “거리감”이 소멸한 세상은 니체가 바라본 대중사회다. 대중사회의 미덕은 "개인주의자"들처럼 각자의 계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행동과 의견이 같은 것'이다. 의견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의견의 통일’ 자체가 중요하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한 의견도 아니고, 대화를 통해 협의한 조정안도 아니다. 그저 같은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대중사회의 기준이다. 똑같은 모습의 사회일지 몰라도 "개인주의자"들의 사회가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를 머리 속에서 굴려본 다음에 우연치 않게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 결과라면, 대중사회는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목적인 사회다.




  역설적으로 "거리감"이 소멸한 세상은 "다들 자기 밖에 모르는" 세상이기도 하다. 자기 밖을, 자기의 바깥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를 모른다. "거리감"이 없는 곳에는 “경계”가 없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세계 사이의 선을 긋지 않아,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복제 혹은 확대로 착각한다. 자신의 테두리를 그을 수 없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개인과 개인 그리고 사회가 서로 아무리 가까이 해도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알기에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프랜 리보위츠에게 자신의 테두리를 그을 수 없는 사람은 책을 자기복제로 읽는 사람이다. 그녀는 “책은 거울이 아닙니다, 책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에요!”라고 말한다. 공공도서관에 가면 흔히 보이는 “책은 도끼다”라는 카프카의 문구와 다르지 않다. 책은 “거리감”을 역이용해서 뛰어오르는 트램펄린이다. 프랜에게 “거리감”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여러 세상을 잘 즐기기 위한 준비물이다. 



 타인으로부터의 "거리감"은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한편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커뮤니케이션이 "거리감"을 영원히 해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마스터키가 아니다. 그리고 닿을 수 없는 타인들은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과 협동함으로써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열리는 게 아닐까. 그게 도시인처럼 산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Disclosure>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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