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시간이 멈춘 당신을 위하여
아마 이 글은 타이밍을 놓칠 대로 놓친 글이다. 10월 29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기에. 우리의 심장을 꿰뚫는 상처가 되었던, 트라우마가 되었던, 여전히 트라우마인 사건을 다룰 것이니까. 이 사건에는 이태원을 실제 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글은 꽤 장황할 것이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10월 29일의 이야기니까.
일단 국가트라우마센터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접적 트라우마를 염려해, 글을 내고 안내 가이드를 짰다. 그들은 정신의학의 전문가니까, 내가 그들 앞에서 주름잡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느낀 트라우마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지나간 혹은 여전한 트라우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10월 29일에 죽은 사람들에 대해 불쌍하다 느끼지만, 거기까지다. 버스를 타며 라디오 뉴스를 들을 때, 심장을 움켜쥐거나 공황장애에 빠지진 않았다. 애초에 나는 공감을 잘 못하는 인간이니까. 그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았다고 어떠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죽어선 안 될 생명들이 꺼졌다는 그 사건에 분노와 억울함은 느낀다. 한마디로 나는 10.29로 트라우마를 느끼지 않은 인간이다.
트라우마가 무엇인가? 그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잠시 흐름을 놓쳤다. 나는 트라우마를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시계가 멈춘 비유를 쓰곤 한다. 우리 마음이 하나의 도시라면, 그 도시의 중심엔 랜드마크가 있다. 그 랜드마크 가운데 종종 '시계탑'이 있다. 평소에 이 '시계탑'은 스마트폰의 시계와 똑같은 시각을 가리킨다. 오늘이 11월 23일이라면, '시계탑'도 11월 23일을 가리킨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이 '시계탑'의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사태를 의미한다. 지금이 11월 23일인데, 내 마음의 '시계탑'은 여전히 10월 29일에 멈춰 있는 사람. 바로 그들이 "트라우마"에 처한 이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기억을 걷고 있다.
10월 29일이란 못이 손목에 박혀 있는 인간, 그들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시계바늘이 멈춰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1577-0199로 지금 전화하길 바란다. 트라우마는 의외로 많이 겪는다. 망설일 필요 없다. 만약 당신이 전화한다면, 사실 트라우마 대처에 절반 아니 7부 능선은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트라우마의 치료법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트라우마란 새로운 것을 경험해도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무한회귀(루프)의 현상이다. 트라우마를 정의했으니, 우린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10월 29일을 여전히 맴돌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을 내가 직접 말하기보다는 다른 작가의 글을 빌리기로 했다. 청춘소설의 대표격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1989)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을 때, 나는 나오코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맨 처음 한 줄만 나와준다면 그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지나치게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극명한 지도가, 그 극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젠 알게 됐다. 결국 따지고 보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p.23)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시계탑을 맴돌며 걷는 이유는 바로 그 기억이 '너무나 지나치게 선명해서'다. '너무나 지나치게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벅차오르거나 가슴이 미어지면 사람은 말이 안 나온다. 그건 마음에서도 그렇다. 그 일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멈춘다. 너무 선명해서 너무 뚜렷해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모르겠다. 트라우마는 '생생한 체험'의 부작용이다.
생생한 체험은 사람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생생한 체험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반대로 말하면, '이야기'야말로 마음의 "시계탑"을 움직이게 한다. 왜 그런 걸까? 슬프게도 우리가 생생한 체험을 '이야기'에 담는 순간, 우리의 생생한 체험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으로 보관된다. 우리의 말은 항상 무언가를 놓치기 마련이니까. 그런 이야기는 그 생생함을 손질해 가공식품으로 만든다. 그럴 때 우리의 체험은 그 생생함을 잃는다. 그것을 철학에선 타자성이라 부른다. 우리의 "시계탑"에 기름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을 무언가 부족한 단어로 정리해야만 한다.
<<노르웨이의 숲>>의 이 글이 건드리고 있는 것은 거의 고전적인 철학적=문학적 주제이다.
'사건'은 언어화되었을 때에 그 본질적인 '타자성'을 잃고 '기지(이미 알고 있는 것)'의 무해하고 아주 익숙하고 순치된 '경험'으로 축소되고 감소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밖에 '사건'을 전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건'의 '타자성'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을 언설 안에 가져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절대 신선한 게 아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소설가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에 의해 내가 말한 투 그대로 1950년대에 정리된 질문이다. 최소한 20세기 후반 소설들은 이 문제를 고심하며 만든 대답들이다.
하지만 여기는 문학을 이야기하는 곳도 아니니까 넘어가겠다. 나는 오히려 '무해하고 순치된 경험으로 축소되고 감소'되는 것의 이점을 말하고 싶다. 바로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방법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생생한 체험을 '이야기'로 표현함으로써 기존의 것으로 가공하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를 대처하는 법이다. 아까 전 내가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방법이라 했는데, 이것은 틀렸다. 트라우마는 사실 치료(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는 바로 같이 사는 것. '공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지만, 트라우마는 명확히 말하면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없애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의 대처는 감기와 매우 비슷하다. 우리는 독감에 걸리기 전에 독감 예방 주사를 맞는다. 알다시피 독감 예방 주사는 무력한 독감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행위다. 즉,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을 신체에 학습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독감 바이러스에 걸려도 우리의 몸은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우리의 몸이 독감 바이러스와 함께 있어도, 잘 지내는 것이 독감 예방 주사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 목표는 독감 바이러스와의 '공존'이다.
트라우마의 치료는 사실 트라우마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일이다. 트라우마의 공존은 바로 10월 29일의 '사건'을 우리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말함으로써 순하게 가공하는 일이다. 머나먼 길을 돌아서 말하자면, 트라우마로 힘든 당신이 1577-0199로 전화를 걸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자신에게 트라우마 예방 주사를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축복이면서 저주인 것이 바로 '망각(Vergessenheit)'이다. 우리가 레테의 강물(망각)을 마시고 힘든 일을 이야기로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망각을 가기엔 갈 길이 멀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각은 이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아직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독자적인 '생생한 체험'으로 여전히 느끼고 있다. 그러니 제발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남기기 위해 노력해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책임"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 "책임"을 말하는 것은 다음 글로 미뤄두자. 단지 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우리는 전원이 모든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죄가 깊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