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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Jul 09. 2023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단상

타노스가 없고 아이언맨이 없고, 배트맨은 없고 조커가 있는 하루키 월드

 제목과 달리, 저는 제가 지금까지 읽은 하루키 소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쓸 것입니다. 단지 최근에 읽은 책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일 뿐이죠. 참고로 저는 문학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문학을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니고, 문학과 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루키의 소설이 재밌어서 읽는 사람입니다. 하루키 소설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 최근 소설 이른바, <기사단장 죽이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Q84> 등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해변의 카프카> 정도겠네요. 이런 사람이 쓴 하루키 월드에 전문성은 높은 확률로 없습니다(그건 보장합니다). 하루키의 소설들이 서로 엮이는 '하루키 월드'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평범한 남자가 고양이를 잃고 나서 수상한 전화를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줄거리를 설명하려면 제 필력으로 중구난방이 될 겁니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난감합니다. 3권짜리 소설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시간도 왔다갔다하고, 내용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있기 때문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평범한 남자의 체험을 중심으로 놓고 있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구조만 취하자면, "집 앞에 굴을 수직으로 파다가, 다시 올라왔더니 집이 아닌 새벽 6시의 공원이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뿐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읽었던 하루키 소설들은 대개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20대 전후의 남자들입니다. 그리고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는 고등학생 여자가 등장합니다(이 소설에서 '가사하라 메이'입니다). 또한 남자 주인공에게 유해한 존재 그리고 주인공과 헤어지는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 번에 품으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하루키 소설들이 대개 "성장소설"의 구조를 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처럼 그의 초기작들은 전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루키의 초기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에서 "쥐"는 데미안과 제이 개츠비와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아름답고, 날카롭고, 그래서 위태롭고, 때론 퇴폐적인 소년미 그 자체입니다. 주인공의 소년다움이 캐릭터로 표현된 것이 "쥐", 데미안, 개츠비입니다.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이 3명 모두 죽거나 떠나거나로 주인공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성장이란 그런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자신의 소년다움을 회복할 수 없는 일이 성장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은 상실입니다. 성장은 우리의 인격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네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오히려 찢긴 상처가 생기는 일에 가깝습니다.


 하루키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악은 확실히 있지만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세계를 끝내려는 빌런은 등장하지만, 그 빌런을 퇴치한 아름다운 유토피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소설은 '그런 유토피아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를 열심히 증명한 이야기입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는 빌런인 '와타야 노보루'가 등장하고 그는 마치 이 소설의 끝판왕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와타야 노보루'가 어떤 점이 '빌런' 같은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와타야 노보루'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사회적 입장도 나름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럽힌(실제 소설에서 쓴 표현)' 사람들이 있고, 주인공은 그에게 '뭔가 싫은 느낌'을 느끼고 그의 말과 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이유입니다. '빌런'이지만, 뭔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도, <바스터즈: 나쁜 녀석들>의 한스 란다 대령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다>의 안톤 쉬거도 아닙니다. 그나마 안톤 쉬거에 가깝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그 폭력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식의 아무 이유도 없는 악의가 산더미처럼 많다네. 나도 이해할 수 없고, 자네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건 분명히 존재하지. 그런 일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1973년의 핀볼> 중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지극히 현실적 일상에서 시작하다가 '이상한 세계'에 휘말리며 점점 그 핵심에 다가갑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나라'의 공기와 시간에 익숙해지는 주인공과 독자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소설은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지하 20층 정도 내려가면 '이상한 나라'가 펼쳐져 있고, '이상한 나라'에 갔던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단순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탄광 속의 고열과 고압을 느끼며 하루키의 소설 속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주인공은 '와타야 노보루'가 '이상한 나라' 속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신체적 직감으로" 느낍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이야기하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딱딱한 벽보단, '물렁한 젤리' 같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환상은 현실로부터 머나먼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하 깊은 곳입니다. 건물 지하여도 건물이 건물인 것처럼, 환상이 현실의 지하지만 환상 또한 또 다른 현실입니다.


 [하루키의 2023년 4월 최신작 제목이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고, 이 제목이 1985년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서문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이 저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사이버펑크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맛깔나게 섞은 소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습니다. 근미래 도쿄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활동했다면 나왔을 법한 이야기. 하드보일드란 그렇다. 애초에 이 세상이 어째서 구렁텅이가 됐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악의가 있다. 거기에 힘겹게 맞선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그 악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저 '힘겹지 않은 척'합니다. 삶은 달걀처럼. 삶은 달걀은 푹 익어서 날달걀처럼 자신의 속을 흘리지 않지만, 세계의 벽 앞에서는 달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루키 월드'에는 정의를 담당하는 히어로가 없습니다. 오직 단단한 척하는 달걀(유약한 인간)만 있습니다. 히어로가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만이 존재하는 암울한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달걀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는 이런 질문이 하루키 소설에 박혀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하루키 월드의 세계관 설정은 '마왕에 대적하는 위대한 용사' 같은 단순하고 강렬한 구조를 벗어나서,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저녁 데이트를 즐기다가 다음날 아침 다정한 아침식사를 같이 나누는 주인공'이 등장해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을 즐기다 착륙하는 이야기를 요구하는 거라 봅니다. 저는 거기서 솔직한 직감과 지성적 절제를 느낍니다. 아마 그것이 제가 하루키 소설을 재밌게 읽는 이유일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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