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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Mar 11. 2024

소설 <단순한 열정>을 읽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쓴다는 것의 난감함 

 <단순한 열정>은 지극히 짧다. 중편보다 조금 짧은 이 소설은 요약하자면, 정말 간단하다. 한 여자가 젊은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속물로서 말하자면, '이렇게 짧은데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다니...'라는 날먹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도 잘 이해할 수 없고 문학사적 가치도 잘 모른다. 소설을 최근에서야 깔짝거리는 독자 1로서 이 소설은 어떤가 하는 말을 할 뿐.



 나는 <단순한 열정>에서 사실 "단순한"에 이끌렸다. 왜냐하면 <단순한 열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스토리도 단순하고, 소감도 단순하다. 소설의 문장에서도 "음미하지 않은 채 그대로 쓴다"라고 한다. 거기서 '음미'라는 표현은 헤겔의 문장을 노린 것이다. 최소한 그의 철학을 의식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지나고서야 그 날개를 펼친다'는 어디선가 들어 본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이 문장은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이 끝나고서야 뒤늦게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사건 당시에는 사건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는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라는 이상은의 가사처럼, 돌이켜볼 때 지나온 길의 아름다움을 안다.



 '뒤돌아봄'을 헤겔은 '황혼'으로, <단순한 열정>은 '음미'로 파악한다. '뒤돌아봄'은 히어로의 특수능력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 중 하나가 시간을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제 멋대로 과거-현재-미래로 나눈 다음,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뒤돌아봄'은 실은 과거를 소회함으로써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고, 그 과거들을 현재로 다시 잇는 복잡한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너무나 쉽게 한다. 영화나 책을 보고 난 다음에, 복기하며 그 의미를 새기는 과정은 대표적인 사례다. 복기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거의 반자동적인 나머지, 우리는 이제 복기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지 않고 "현재"에 우린 있지 못한다. 오히려 우린 '현재'에만 있는 법을 까먹었다.



 프랑스 철학에서 '사건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큰 과제 중 하나였다. '있는 그대로'를 현대 철학에서 "타자성"이라 부른다. "타자성"이란 단어를 알 필요는 없다. 일단 다시 돌아가야 할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현재"가 밀고 당겨지면서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엿가락처럼 당겨지고 밀린 현재만을 알고 있다. 우리가 맡고 있는 '현재'는 사실 냉동보존되고 해동된 현재뿐이고, 생생하고 날 것의 현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걸 만질 수 없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 모리스 블랑쇼는 '사건의 생생함(타자성)'을 보존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언어의 한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건을 전달할 때는 언어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블랑쇼의 질문은 "사건이 언어를 통해 전달될 때, 그것은 축소되고 순치된 경험으로 변한다. 우리는 어떻게 사건의 타자성을 보존한 채 언어로 그 사건을 회수할 수 있을까?"다.



 위 질문은 앞서 내가 설명한 비유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이외의 선택이 없는 인간의 한계를 언어예술인 문학으로 돌파할 수 있는가?' 나는 <단순한 열정>이 하고 싶은 과제가 그것이라 짐작한다. "현재를 에포케(판단중지)에 넣을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오히려 우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한 법을 까먹었기에(예전에도 알았는지 나는 모른다) 할 수 없는 불능을 겪는다. 단순해서 복잡한 일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때로 우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오히려 단순한 것을 할 수 없다.


 

 한편 <단순한 열정> 속 주인공은 뭔가 주도권이 없는 인간이다. 항상 전화를 신탁처럼 기다리는 대단히 수동적 인간이다. 자기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이다. 이 구도는 내가 읽은 소설들 중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속 주인공 같다. 그는 이렇다 할 삶의 목표도 없지만, 불만족도 딱히 없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의문의 전화를 받으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같을 뿐이다. 그보다 내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재회였다. 그 재회는 내게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 같았다. 테리 레녹스를 보내주는, 고독한 필립 말로의 장면이 연상됐다. 그러나 성장소설이 아닌 <단순한 열정>은 자기 안의 소년성과 이별하는 내용이 아니다. 타자를 떠나는 내용이다. 이것은 내가 읽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오히려 위 소설들을 비튼 게 아닐까. 집단적 무의식이나 소년성과의 이별 같은 성장소설의 정석으로 회수되지 않는 이야기를 쓴 게 아닐까. 개인적이고 단순한 소설, 하지만 모든 인간의 한계이자 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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