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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연 Oct 24. 2022

옵션쇼크! 키클롭스 꼬리를 밟은 사람들(5)-연재소설

1.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5

                                                                            


(포식자 5)     


 2009년 연초에 증시는 1,000pt대에서 박스권에 머물렀으나 3월부터 다시 반등하기 시작했고,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한 5월부터는 1,300pt대에서 박스권을 다시 형성하며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던 2009년 7월 중반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고만해는 남상문 과장과 장 마감 후 거래처 순회 방문을 다녀와 저녁 접대를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로 귀가하던 중 여름 소나기가 시원하게 한차례 지나갔다. 그 덕분에 슈트부터 양말까지 모두 눅눅한 습기가 찼고, 이를 에어컨 바람으로 말리면서 약속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족보에 없는 형제와 만나 어느 밤하늘 아래서 호형호제하며 그는 새벽까지 술잔을 주고받아야 한다.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한 후, 필기구가 서랍 속에서 끝 맞춤을 한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다음 가까스로 축축한 기분을 추스르며 자리를 일어서려는 순간 안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전화 액정 화면에 상대방 이름이 뜨질 않는 것을 보니 최근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다. 카드나 보험 마케팅 전화이겠거니 생각하며 전화를 귀에 대는 순간 고만해는 얼어붙고 말았다.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제이슨이었다. 고만해를 과거 주눅 들게 했던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리자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헬로우! 헬로우! 고만해 씨?”

제이슨이 기억 속의 선명한 목소리로 고만해를 부르고 있었다. 고만해가 천천히 대꾸하자 제이슨이 전화한 용건을 전한다. 다음날 중요한 비즈니스로 한국에 들어와서 프로이센 증권 사장과 미팅이 있으니 자기를 마중 해달라는 것이었다. 제이슨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뉘앙스는 네가 나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중압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고만해의 어쩌면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또는 제이슨의 영국계 영어 특유의 단단한 억양과 강한 발음 영향도 있을 것이다. 제이슨과 통화 후 전 부장에게 내용을 보고하자 자기가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다시 연락할 테니 고만해는 먼저 저녁 약속 장소로 출발하라고 한다.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나가는 88 자동차 전용도로 램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차들로 가득했다. 이 길은 안 막히면 오히려 불안할 거라고 고만해는 생각하며 저녁 약속 상대방에게 저녁 약속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는 문자를 보내고 나니 전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전 부장이 사장에게 확인하니 오늘 오후 프로이센 은행의 홍콩 자산운용 본부에서 협조 이메일이 왔었다고 한다. 프로이센 은행 본부 차원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협의하기 위해 투자 담당자가 한국 프로이센 증권을 방문할 예정이므로, 고만해가 제이슨을 잘 에스코트 하라고 사장이 지시했다고 전한다. 그날 저녁 고만해는 3살 어린 펀드 매니저에게 호되게 시달렸다. 그 접대 후유증으로 다음날 오전 내내 시달리다가 점심을 거르고 사우나에서 정신을 겨우 차렸다. 그의 눈이 겨우 초점을 잡으니 벌써 제이슨을 영접하러 갈 시간이었다. 

 고만해는 남상문 과장에게 제이슨이 숙박할 호텔 예약을 확인한 후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달래며 공항으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만난 말쑥한 베이지색 정장 차림의 제이슨은 마중 나온 고만해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고만해는 제이슨이 예상 밖으로 반가워하자,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같이 배웅 나간 남상문 과장도 이렇게 많이 당황하는 고만해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만해가 겉치레를 훨씬 뛰어넘은 제이슨의 친밀감 표현을 감당하는 동안에 그들이 탄 차는 프로이센 증권으로 도착했고, 그는 제이슨을 무사히 사장 집무실로 안내하며 임무를 마쳤다. 사장실의 미팅에는 사장과 제이슨 단둘만이 참석했고 아무도 배석하지 못했다. 보통은 담당 임원이나 부장까지도 같이 배석하는데 이번은 이례적으로 협의 내용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고만해는 제이슨을 호텔까지 안내해야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미팅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기다리면서 고만해는 싱가포르에서 제이슨과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가 자발적으로 떠올렸다기보다는 싫어도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달프고 서러운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6개월로 연수 기간이 짧았기에 망정이지 애초 계획대로 1년이었으면 다 채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제이슨은 고만해를 완전히 길들였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절대적 권력과 능력을 갖춘 제이슨에게 고만해는 조련사 앞의 순한 동물이었다. 고만해는 그가 왜 자신을 가혹하게 조련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무능력하다며 내쫓은 제이슨이 오늘은 그를 왜 저리 반갑게 대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어리둥절했다. 제이슨의 사장 미팅 덕에 전 부장은 물론 법인영업 라인 임원까지 덩달아서 대기를 하는 중이다. 사장실에 들어간 지 세 시간이 접어들 무렵 사장실에서 호출 전화가 떨어졌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당당 임원과 전 부장과 고만해는 사장실로 올라갔다. 사장실 문이 열리자 제이슨과 사장은 작별 인사로 악수를 하며 같이 걸어 나왔다. 늘 부드럽던 사장의 표정이 조금 상기된 느낌이 들었다. 

‘이 자식이 사장도 막 다뤘나?’ 

고만해는 속으로 상상을 했다. 이때 정 사장이 고만해를 쳐다보며 당부한다. 

“고만해 차장. 제이슨 씨 불편하지 않게 특별히 모셔요. 내일 출국도 잘 안내하고” 

그리고는 다시 제이슨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제이슨. 만나서 반가웠고 말씀한 내용은 차질 없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잘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정 사장님.”

제이슨(일러스트-조수연)

사장실 문을 나서며 제이슨은 기다리던 담당 임원과 전 부장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고만해에게 나가자고 재촉했다. 제이슨의 안하무인 태도에 전 부장과 임원이 머쓱해서 뒤로 물러선다. 남상문 과장이 차를 대기했다가 제이슨과 고만해 둘을 태우고 예약된 시청 인근의 호텔로 향했다. 차가 도착하자 제이슨이 고만해에게 우리 둘만 얘기하자고 눈짓한다. 그는 남상문 차장에게 차를 가지고 먼저 퇴근하라고 하고 둘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슨은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하자고 했다. 그가 명나라 칙사 대접을 요구할지 몰라서 사장 법인 카드까지 받아 챙겨왔는데 고만해는 좀 김이 새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이슨이 구차한 접대는 가릴 줄 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가진 프로페셔널이라는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기에 더 권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간단한 식사 후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 고급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를 큰맘 먹고 한 병 까서 나누어 마시며 얘기를 시작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고만해는 제이슨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파란 눈동자와 얘기하는 착각이 들었다.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인종들은 뭘 말해도 진심이 담긴 것 같다. 지난번 날 쫓아낼 때도 고만해가 반항하고 대들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파란 눈동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파란 눈동자를 깜박이며 제이슨이 얘기한다.

“미스터 고. 우리 제대로 돈 좀 만들어 봅시다. 오래전 싱가포르에서는 미스터 고를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처음부터 맘에 들었습니다. 우리 관계도 당신 이름처럼 스톱(Stop) 말고 고(Go)합시다. 레츠 고( Let’s Go ). 하하. 자 이제부터는 날 좀 미스터 고가 도와주셔야 해”

고만해는 제이슨의 갑작스러운 농담과 다정한 요청에 당황스러웠다. 과거 제이슨은 언제나 갑’이었고 그는 ‘을’이었다. 이 관계는 고만해가 지금도 프로이센 은행 그룹에 발을 들이고 있는 한 불변의 사실이었다. 그가 뭘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고만해는 의아했다. 설사 도울 것이 있다고 해도 과거에 한껏 무시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아무런 감정의 정화 과정 없이 도와 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찜찜했다. 

“제가 감히 제이슨 매니저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당황스럽네요”

더듬거리는 영어지만 정확한 뜻을 담아 고만해는 또박또박 문장을 만들어 전했다.

제이슨이 달항아리 닮은 와인 잔 벽을 따라 흐르는 와인 방울을 응시하다가 고만해를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내가 고만해 당신을 찾아온 것이 엉뚱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고만해 씨는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란 걸 난 알아요. 싱가포르 연수 내내 억지를 써서 괴롭히고 과제를 줘도 당신은 참고 견뎠죠. 고만해 씨는 연수 중간에 쫓겨났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사실은 내가 조기 졸업을 시킨 거예요. 그때 고만해 당신은 나와 팀워크를 이룰 만한 자질과 인성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더 연수한답시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현장 경험을 쌓고 나와 일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거죠. 아마 그동안 나를 많이 원망했을 겁니다. 어때요. 내 말이 위로되나요?”

고만해가 위로라는 말에 욱하는 감정이 솟았다. 그러나 분노인지 감동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일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를 괴롭히고 쫓아냈다고요? 왜요? 순순히 연수 과정 마치고 보낼 수도 있었잖아요.”

제이슨은 이미 그런 반응을 예측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내 스타일이라고 해 둡시다. 사실 고만해 씨가 유약하고 잇속만 차리려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 연수 테스트의 목적이었어요. 오랫동안 같이 난관을 견디고 헤쳐나갈 한국 시장의 파트너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했으니까요. 자세한 것은 지금 말할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프로이센 금융 그룹의 세계 공략 전략 가운데 한 조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죠.”

고만해가 속으로 외친다.

‘세계 공략 전략이라고?’

 고만해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고만해 씨는 선택받은 겁니다. 축하해요. 이제부터 미스터 고는 그룹을 위해서 큰일을 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은 할 겁니다. 사장과 얘기는 다 되어 있으니 내일부터는 프로이센 은행의 국내 투자 펀드의 주문을 맡을 준비를 하세요. 팀도 제대로 정비하고요. 외부 마케팅은 크게 신경 쓰지 말고 프로이센 지원에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세요. 수수료 수입은 프로이센 은행 펀드 지원만 해도 한국 시장에서 톱 랭크에 올라가도록 만들어 줄 겁니다.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자 프로이센 은행의 선택을 받은 사람에게 그룹이 제공하는 혜택입니다.”

고만해는 어리둥절 하다못해 생각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보상과 혜택? 이 사람 무슨 얘기하는 거지?’

지난 연수에서 그가 받은 핍박의 원인을 들었으면 머리가 시원해져야 하는데 고만해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제이슨의 대화가 자기 안의 무언가를 깨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제이슨이 고만해의 운명까지도 조작할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것이 그는 불쾌했지만, 그가 던지는 제안을 그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제이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고만해의 욕망을 정확히 건드리고 있었다. 제이슨이 그의 설계도에 고만해를 이미 포함했다는 사실에 확신을 덧칠하면서 순식간에 그에게 안도감은 물론 자부심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래! 글로벌 은행의 자산운용 매니저가 친히 한국까지 와서 만들어주는 기회인데 나 같은 흙수저가 의심한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불경(不敬)이며 결국 사회 부적응 행위나 다름없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돈 벌 기회일 것이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고 어떻게 달동네 벗아 날 기회를 잡을 것인가?’

그의 가슴 속에는 욕망이라는 편도 열차가 출발의 기적 소리를 길게 내뱉고 있었다. 자본시장을 출발해서 일확천금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이 열차는 출입구가 제한되어 있지만 늘 사람들로 붐빈다. 고만해는 제이슨이 특실 티겟을 그의 손에 쥐여줬다고 믿으면서 기꺼이 열차에 오를 것을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고만해가 출근하자마자 사장의 긴급 호출로 그는 전 부장과 함께 사장실로 뛰어 올라갔다. 사장은 제이슨을 잘 배웅 했는지 확인하고는 독립된 팀을 꾸리고 팀장을 맡으라고 고만해에게 지시했다. 그 팀은 프로이센 은행의 국내 투자 펀드를 전담할 것이며 회사의 중요한 수익원이 될 것이니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했다. 우선은 전 부장 밑에서 업무를 준비하다가 완전히 준비를 마치면 별도 부서로 독립시키겠다고 했다. 전 부장에게는 현재 데리고 있는 인력 중에서 고만해가 원하는 사람은 우선 지원해주라고 지시했다. 전 부장은 이미 각오했다는 듯이 사장의 지시에 바로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사장실을 나오면서 전 부장은 고만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고 차장 아니 고 팀장. 예상은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고 팀장이 활약할 무대가 빨리 열리네. 잘되면 내가 추천했다는 것 잊지 말고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이틀 후 고만해는 팀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고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남상문 과장을 제일 먼저 팀으로 데려와 세부적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는 일주일 만에 팀을 꾸리고 제이슨에게 준비 완료 보고를 했다. 일단 해외 매니저의 주문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 모의 연습을 2주간 실시했다. 메일과 메신저, 전화로 서로 주문을 주고받을 프로토콜을 정리하고 8월이 돼서야 처음 주문 업무를 시작했다. 일주일간은 고만해 팀장이 직접 주문을 받고, 앞으로 담당할 주식 트레이더에게 해설하며 전달했다. 소량 테스트 주문부터 시작해서 수 개월간 테스트는 계속되었다. 트레이더들이 주문 처리 숙련을 하는 동안 고만해는 한국 시장에 대한 리포트를 제이슨에게 매일 제출했다. 제이슨이 별도로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제이슨에게 이미 밥줄이 걸렸으니 고만해는 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했다. 그는 한국 시장을 순찰하고 경계하면서 휴전선 경계소초의 군용견처럼 머리와 꼬리를 당당히 들고 제이슨의 한국 진출 미션을 성스러운 신념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프로이센 그룹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이 무렵 고만해는 반복해서 자기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정 사장이 면접에서 얘기한 그룹에 대한 충성 요청이 떠올랐다. 제이슨은 서울을 다녀간 후 내가 언제 그랬었냐 싶게 다시 사무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차례 전화 미팅으로 업무상 보고와 확인을 정례적으로 이어갔다. 제이슨은 고만해 팀의 주문 처리 속도와 정확성을 계속 점검했다. 그는 고만해의 한국 시장 리포트를 계속 받아봤지만, 그의 투자전략이나 지시는 고만해의 분석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만해가 펀드 매니저들 모임에서 얻은 정보를 취득해 특정 종목을 추천해도 제이슨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몽상가 1)     


 5월 17일. 포천시 외곽의 사슴농장. 구변수는 생전 처음 와 보는 곳이다. 정력을 걱정하거나 쓸 일이 많은 사람은 단골로 찾는 곳이라는 데, 보신을 위해 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아먹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그는 나쁜 짓을 하러 온 것처럼 불편하다. 사슴 목장을 둘러친 녹색 금속망 우리를 따라 그는 10분 남짓 산 중턱을 계속 걸어 올라가고 있다. 그가 워낙 등산을 멀리하는 저질 체력인 것도 원인이겠지만, 사슴농장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에 조금 놀랐다. 그가 지금 이곳을 오르고 있는 이유는 그가 맡은 136억 원 규모의 파생투자 전용 사모펀드의 리빌딩 론칭(오래된 펀드를 다시 고객을 모집하고 운용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이 펀드의 투자관리는 와이트(Wight) 자산운용사가 맡고 있다. 와이트 자산운용사는 대주주 이광석이 증권 바닥에서 32년간 그가 모은 돈을 전부를 투자해 작은 운용사를 인수하고 사장 성진용을 영입하여 만든 회사다. 대주주 이광석은 증권업계에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고액자산가들에게 펀딩하면 3~4조 원은 모을 수 있었고, 이 정도 회사 규모면 알뜰히 운용해서 먹고는 살 수 있겠다고 계산했다. 또한 그는 증권사 지점 한구석에서 큰 개미로 불리던 생활을 그만 정리하고 더 의미 있는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특히 그가 만든 자산운용사를 통해 동지들 자금을 모아 전용 사모펀드를 만들면, 기관투자가 대접을 받을 수 있어서 투자 비용, 거래소 보증금 규제 면제, 공매도 활용, 시장 정보 확보, 블록 딜(block deal)을 통한 할인 매수 등 개미 투자자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한 특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자산운용업에 뛰어든 중요한 동기다. 한편 자산운용회사의 사장직은 오랫동안 증권사에서 이광석의 계좌 관리를 맡아 왔고, 증권사 임원으로 경영 경험이 풍부한 성진용을 설득해서 맡겼다. 이광석은 등기 임원이 아닌 대주주로서 직원들에게 회장으로 불리는 명예직을 택했다. 운용사를 설립한 지 3년이 되었는데 회사는 꽤 짭짤한 경영성과를 보였다. 이번에는 회사 인수전에 있던 펀드 중 성과가 지지부진했던 것을 골라 파생상품 투자 전용 사모펀드로 리빌딩하고 파생 투자에 새롭게 도전한다. 이 펀드를 위해 펀드 매니저도 새로 영입하고 이광석 회장이 전주(錢主) 7명에게 직접 자금을 모았다. 한편 구변수는 대주주 이광석의 외 조카로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운용사에서 리서치와 보조 펀드 매니저를 해왔는데, 이광석이 자산운용사를 만들면서 - 능력과는 상관없이 - 일약 메인 펀드 매니저로 스카우트했다. 이번 새로 출발하는 파생 투자 전용 사모펀드의 담당 펀드 매니저가 구변수인 것이다. 펀드 규모는 136억 원으로 크지 않지만, 순수한 파생 투자 전용 사모펀드로서 업계의 관심도 크고, 마음껏 극한의 공격적인 운용을 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구변수를 설레게 했다. 이 사모펀드의 브로커를 전담할 증권회사는 라움(Raum) 증권이 선택되었다. 선택의 배경은 이광석과 30년 넘게 증권업계에서 인연을 맺고 있는 라움 증권의 천만수 사장 때문이다. 오늘은 재건하는 사모펀드 증권 계좌 관리를 라움 증권에 맡겨준 감사 인사로 천만수 사장이 와이트 자산운용사 경영진과 직원에게 대접하는 자리이다. 라움 증권에서는 천만수 사장과 법인영업본부장인 김종구, 법인영업부장 조일해 부장이 참석했고 와이트 자산운용에서는 대주주인 이광석 회장, 성진용 사장, 운용본부장 이무상 그리고 구변수 차장이 동참했다.      


(몽상가 2)     

 구변수가 우리 안의 사슴이 어디 있나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사슴농장 와 본 적 있어요?”

구변수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라움 증권 법인영업부장 조일해다. 천만수 사장의 직접 지시로 와이트 자산운용의 증권 브로커 서비스를 전담하고 있다. 구변수가 업무를 늦게 마치고 오는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업무 파트너인 그가 마중 나왔다.

“이런 거 어르신들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전 별로예요. 조 부장님은 어떤가요. 사슴피가 필요한 연세인가요?”

조일해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사슴농장(일러스트-조수연)

“아니요. 저도 아직은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지난번 저희 사장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생처음 먹어봤는데 기운이 나는 것도 같습디다. 사실 저도 평소에 보약은 사양하지 않기는 하지요. 하하. 자. 저쪽으로 갑시다. 지금 농장주인이 특별한 메뉴를 준비하셨고, 어르신들 말씀이 오늘 참석한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농장주인과 특별의식을 치르고 오라고 합니다. 사슴농장에서 피를 나누는 의식이니 도원결의라고는 할 수 없고 녹원(鹿苑) 결의라고 해야 할까요? 고대 문명에서 피는 우리가 생각하는 잔인함과는 반대로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제물이잖아요? 앞으로 사모펀드 운용이 잘되기를 기원도 하고, 특히 우리 담당 펀드 매니저인 구 차장님은 특별하게 좋은 기를 받아야 가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어서 가십시다. 하하”

 조 부장의 화려한 언변을 들으며 구변수는 법인 영업하는 사람들 말은 소문대로 청산유수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세 치 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서 먹고사는 마케팅의 귀재들이다. 유명한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도 이들을 감동을 자아내게 표현하는 대사가 있다. 63세의 세일즈맨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죽음을 택한 후 친구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사이다.

‘세일즈맨이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미소를 날리는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세일즈맨답게 조일해 부장도 구변수에게 미소를 연신 날리고 있다. 사슴을 가두는 울타리로 설치한 녹색 펜스가 끝나는 곳에 컨테이너를 몇 개 연결한 임시 건물이 보인다. 사슴 가공처리 공장으로 보이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신을 농장주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스티로폼 상자에서 보온병을 꺼내 큰 대접에 붉은 용액을 반 정도 따라서 건넨다. 따르면서 들어간 공기인지 대접에 담긴 검붉은 용액에 거품이 군데군데 생기고 아직 생명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이 용액은 불과 수십 분 전에 사슴의 몸에서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구변수는 느낄 수 있었다. 농장주인이 건넨 대접을 입에 대고 구변수는 숨을 참고 단숨에 꾹 삼킨다. 입안으로 걸쭉하면서 휘발성을 내는 묘한 향을 담은 액체가 들어오는 듯싶더니 얼마 머물지 못하고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끈적거리고 더우면서 젤과 액체 중간 질감의 전혀 색다른 이것이 피 맛이구나 하고 그는 정의했다. 피의 응고를 막는다고 하면서 농장주가 건네주는 탄산 소화액을 구변수는 얼른 마시고는 의식을 다 치른 전사처럼 의기양양하게 일행들이 주연을 벌이고 있을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녁 식사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술자리가 상당히 무르익어 있었다. 8인용 평상의 한쪽은 라움 증권 사람들이 차지했고 그 반대편은 와이트 자산운용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상당량의 소주병과 맥주병이 비어있는 걸 보니 아마 폭탄주가 다섯 순배 이상은 족히 돌아간 것 같았다. 이광석 회장이 양쪽 사장들하고 얘기하다가 구변수가 들어가자 손짓하며 부른다. 

“어서 와. 구 차장. 인사드려. 여러분. 이번 와이트 자산운용회사 파생투자 전용 사모펀드의 운용을 맡게 된 구변수 차장입니다. ”

이광석은 구변수 차장이 묵례를 마치자마자 분위기가 구 차장에게 더 집중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뜻인지 얼른 주제를 바꾸어 자신의 얘기를 이어 간다. 

“저는 천 사장과 수많은 전쟁터를 함께 겪은 전우와 같은 사이입니다. 내가 30년 전에 액세서리 노점상으로 모은 돈 1억 남짓으로 주식투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1년 만에 거의 까먹었을 무렵에 천 사장을 만나서 제대로 된 투자를 배울 수 있었고, 그 후 천 사장이 30년 이상 물심양면으로 도와줘서 오늘 펀드 회사를 경영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와이트 자산운용은 증권업계에 공식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이고 이번 파생 투자 전용 사모펀드는 진군나팔과 같은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평생 갈고 닦은 투자 경험을 총동원하여 와이트 자산운용이 커나가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특히 이번 사모펀드는 지금은 충성도가 높은 지인 7명만이 펀드에 참여했지만, 가입자 수 1,000명에 3조 원 규모의 사모펀드로 키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사모펀드를 바탕으로 운용사 전체 규모를 3년 이내에 5조 이상으로 키워서 명실공히 초고급 자산관리인 웰스 매니지먼트(Wealth Management) 용도의 사모펀드 전문 운용사로 와이트 자산운용을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다행히 최근 금융당국에서도 사모펀드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곧 헤지 펀드 시대가 국내에서도 크게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자산운용사도 한국이라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와이트는 10년 후에는 본사를 스위스에 두고 한국 투자 전용 사모펀드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이 회장의 일장 연설에 천 사장이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치며 화답하자 나머지 참석자들 모두 화들짝 놀라면서 박수에 동참한다. 이 회장이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와이트 자산운용 성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역시 우리 이광석 회장님은 야망이 끝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돈도 벌 만큼 버셨는데도. 그렇지요. 세계로 나가야죠. 좋은 생각이십니다.” 

성지용 사장이 잔을 들고 일어선다. 거창하게 한마디 거들 생각인가보다.

“와이트 자산운용은 기존의 운용사와는 다른 영역을 개척할 겁니다. 이광석 회장님은 파생 투자 전용 사모펀드를 시작으로 부자 전용 헤지펀드 영역을 개척할 것이고 저는 제 평생의 운용 경험을 녹여서 컴퓨터 시스템에 의한 운용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시스템 운용 영역을 만들어 갈 겁니다.”

성지용 사장은 증권회사에 입사해서 개인 증권 브로커로 20년 근무하다가 나름대로 증권투자의 비결을 터득했고, 고액자산가 자금을 관리하는 투자 자문업 담당 임원을 하다가 이광석 회장의 눈에 들어 스카우트되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 이름인 와이트의 뜻을 아시는 분 많지 않을 겁니다. 와이트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귀신입니다. 괴기물 관련 사전에 와이트는 왕이나 왕비의 시체에 사악한 영이 붙은 것으로 반지나 금으로 치장하고 자기 패거리를 늘이기 위해 무덤에 누군가 찾아오면 주문을 걸어 끌어들입니다. 상상 못 하셨을 겁니다. 회사 이름이 이런 섬뜩한 뜻이었을 줄은요. 우리는 투자에 관해서는 귀신이 되고 한번 가까이 온 고객들은 주문을 걸어 같이 죽든지 살든지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더 섬뜩하다고요? 하! 하! 제가 저주하건대. 자.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앞으로 와이트와 함께 살거나 같이 죽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합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자!”

술자리의 참석자 전원이 술잔을 들고 건배 구호를 따라 한다. 구변수 차장도 회사 이름에 그런 의미가 있는지는 몰랐다. 그는 이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도 끔찍했지만 같이 죽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자리의 구도는 증권시장에서  바이(Buy) 사이드 사람들과 셀(Sell) 사이드 사람들이 각자의 탐욕을 마음껏 드러내고 경연하는 축제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증권시장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구조에서 구분해보면 증권사는 주식을 파는 측이라고 해서 셀(sell) 사이드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서 주식을 사서 운용하는 측을 바이(Buy) 사이드라고 분류한다. 셀 사이드, 바이 사이드 각자의 이해관계의 대립 또는 합치를 통해 증권 산업은 복잡한 역학 관계를 형성한다. 그 역학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증권 정보 분야에서의 먹이사슬이다. 

 투자 교과서에서도 투자 정보와 관련한 부분 비중이 절대적일 만큼 금융시장에서 정보는 투자의 처음이자 끝이다. 이런 가운데 증권회사는 주식시장의 전망이나 산업, 기업을 분석한 정보를 주식을 거래하는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이른바 리서치센터라는 곳을 운영한다. 공식적으로는 리서치센터가 증권시장에 정통성 있는 정보를 공급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증권회사들은 주식을 사는 고객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리서치센터를 운영한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보고서는 경제, 산업, 기업 등 기본적 분석 방법에 따른 보고서와 증권시장의 수요 공급 등 투자 세력과 거래 패턴 등 기술적 분석에 의한 분석 보고서 최근에는 수리 계량적 시장분석을 하는 퀀트 기법 보고서 등이 생산된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보고서들은 결론적으로 투자자가 금융시장의 투자 포지션을 가질 것인지, 투자 포지션을 정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사자 또는 팔자 즉, 매수 또는 매도를 권유하는 두 종류의 리포트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주식을 비롯한 금융상품을 중개하는 거래소 시장에는 매수자와 매도자가 동시에 존재하지만, 이상하게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리포트를 보면 주식을 팔아야 한다는 의견(또는 매도 리포트)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히 온종일, 일 년 365일 시장 정보를 캐고 쫓는 애널리스트가 바보일 리는 없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투자자가 기대 수익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주식을 사야 증권회사에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주식매도는 투자자가 매수한 이후에야 가능하다. 매수로부터 매도로 이어지는 주식거래 회전수가 늘어날수록 거래소 거래금액이 늘어난다. 증권회사의 위탁거래 수수료는 거래금액에 위탁수수료 징수율을 곱한 금액이기 때문에 경영수지를 극대화해야 하는 증권회사는 리서치센터의 보고서를 통해서 가능한 시장 거래금액을 최대한 증가시킬 동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으로 셀 사이드의 리서치센터가 생산하는 주식정보는 되도록 많은 주식을 사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시장이나 산업, 기업정보를 미화하고 흠결은 못 본 척 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주식투자자가 정확한 투자 판단을 하기 위해 리서치센터의 리포트를 보거나 증권회사가 주최하는 투자설명회에 참석한다. 어쩌면 고급 학력과 복잡한 금융용어를 동원한 리포트로 금융상품을 파는, 이러한 행위는 성분 모를 건강보조식품 설명회를 열고 사시사철 몸이 아픈 노인네들에게 온갖 의학적 미사여구를 동원해 약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먹이사슬의 구조에서 미뤄보면 셀 사이드는 결코 “고객”들의 미래를 위하여 시장과 주식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셀 사이드보다 바이 사이드 모두가 약자는 아니다. 바이 사이드는 크게 기관투자가와 개인으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대한민국 - 또는 세계 어디서나 - 금융 산업 먹이사슬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은 기금, 펀드 등 대형 자금을 펀딩하고 운용하면서 주식, 파생을 대량 매매하는 기관투자가다. 한편 유럽의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은 이들을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지배자로 평가한다. 그들은 증권회사에 절대 ‘갑’으로 인정받는다. 대부분 증권회사의 리서치센터가 기관투자가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시장 정보를 생산한다. 증권회사는 기관투자가의 대량 매매를 위해 맞춤형으로 생산하는 시장, 종목 분석 보고서를 개인들에게도 생색내며 제공한다. 정보의 낙숫물 효과라고 해석하면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기관투자가용 정보를 활용해서 투자한 많은 개인투자자가 실패담을 늘어놓는다. 영리한 개인투자자는 절대로 리서치센터 리포트를 믿고 투자하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투자 정보도 투자자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수리 먹이를 개미가 먹는다면 버티지 못하고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기관투자가 서비스를 위해 탄생한 리서치센터가 매도 보고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이 매도 보고서가 슈퍼 바이 사이드의 건강에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투자가는 투자 규모가 크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투자를 한다. 다만 기관투자가가 구성한 포트폴리오가 투자성과의 비교(벤치마크)가 되는 시장지수의 수익률 대비 높은 기대 수익률을 추구하는 공격적(액티브) 전략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시장지수 수익률을 따라가는 수동적(패시브) 전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포트폴리오 투자는 다양한 주식을 비롯한 채권, 선물, 옵션 등을 포함하는데 투자 포지션을 보유하는 상태에서 증권사가 매도 리포트를 내면 포트폴리오 내의 해당 종목에 부정적 전망이 형성되어 주가와 포트폴리오 가치가 하락할 확률이 높다. 펀드 매니저는 증권사의 기여도를 자체 평가해서 기금 운용에 수반되는 주식을 비롯한 금융상품의 위탁주문거래를 증권사에 주는데 이때 꾀심 죄에 걸려 배제될 수 있다. 또 한편 상, 하반기 각종 언론사의 증권사 리서치센터 품평회에도 펀드 매니저의 의견이 반영되어 애널리스트의 연봉을 좌지우지하므로 애널리스트가 기관투자가가 보유한 종목에 대한 매도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이렇게 증권 산업의 셀 사이드와 바이 사이드의 먹이사슬은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며 작동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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