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06
(포식자 6)
2009년 한국 주식시장은 금융위기 영향권에서 벗어나 코스피 지수가 2월 1,000포인트 수준에서 9월까지 1,700포인트 수준까지 반등했다. 다행인지 실력인지 제이슨의 펀드는 7월 이후 상승세를 타며 펀드 운용 시작과 함께 펀드 수익률은 20% 이상을 기록했다. 이후 시장은 단숨에 금융위기 이전 코스피 지수 2,000포인트 시대로 복귀할 것 같았으나 그 기세가 식으며 2009년 추석 이전부터 연말까지 박스권에 갇힌 모습을 연출했다. 이후 박스권 장세는 2010년 5월까지도 이어졌다. 증권업계의 다른 법인영업팀은 시장의 경계심리 속에 거래량이 줄어들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고만해의 팀은 제이슨의 활발한 거래로 예외였다. 2010년 초 프로이센 증권은 2009년 사업연도 결산과 성과 평가를 시행했고, 고만해의 팀은 구성한 지 반년도 안됐음에도 다른 부서의 1년 성적을 뛰어넘는 성과를 기록했다. 고만해 팀은 2009년 연말 두둑한 성과급을 받았고 고만해는 팀장을 유지하면서 상무로 직위를 높였다. 제이슨이 예고한 보상과 혜택이 실현되고 있었다. 2010년 들어서도 고만해 팀의 성과는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있다. 이쯤 되고 보니 제이슨은 그야말로 고만해 팀에게는 묵시적으로 교주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고만해는 자신이 팀원들에게 인센티브를 계시하고 제이슨의 복음을 전달하는 사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이제는 이 시스템을 수호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2010년 5월 25일. 제이슨의 신성(神性)을 고만해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종합 주가지수가 1% 넘게 하락하며 출발해서 11시 반 넘자 3% 넘게 빠지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만해 팀에 주문한 제이슨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이날 시장 급락으로 급격하게 투자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제이슨 이놈은 정말 귀신이 아닌가? 주식 하다가 죽은 서양 무당 귀신이 붙어있나?’
2010년에도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금융위기 직전까지 세계 금융시장은 세계화 트렌드 아래 제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의 결속력보다 더 강한 유기적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뉴욕과 런던 금융시장은 글로벌 투자은행의 은행 간 자금 거래와 금융상품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글로벌 투자은행은 뉴욕에서 금융위기가 터지자 순식간에 자금과 금융상품 네트워크를 타고 유럽 금융 산업으로 확산한 후 전 세계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금융 산업이 흔들리자 해외 금융에 의존도가 높고 재정이 취약했던 유럽 국가들의 경제가 급격히 악화했다. 2010년 연초부터 그리스를 시작으로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페인까지 흔들렸다. 시장은 이들 국가의 머리글자를 따서 피그스(돼지들 PIIGS)라고 싸잡아서 놀렸고 2월에는 한 차례 국내 주가가 바닥까지 침몰했었다. 이후 제이슨은 4월 말까지 반등과 5월 주가 폭락 시점도 정확히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최근 며칠 제이슨은 외 가격(OTM ; Out of The Money)의 풋 옵션을 사고 콜 옵션을 매도해서 합성선물을 매도하며 주가 하락 시 이익을 늘려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풋 옵션은 계약 시 지정 주가지수(행사 가격) 이하로 실제 주가지수가 하락할 때 행사가격과 실제 주가지수 차이만큼을 이익으로 실현할 수 있는 투기 성격이 매우 강한 금융상품이다. 특히 외 가격(OTM) 풋 옵션은 현재 시장가격보다 행사가격이 매우 낮아 이익이 실현되기 어려운 옵션을 말하며, 이 옵션은 거래 가격이 행사가격이 현재 시장가격 근방에 있는 정상적 옵션의 100분의 1 이하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싸게 사서 주가지수가 급락할 때 극단적인 투기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외 가격 풋 옵션을 복권처럼 생각하고 사두는 투기꾼도 있는데 기관투자가가 이것을 샀다는 것은 뭔가 상당한 정보력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만약 기관투자가에 속하는 펀드 매니저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극단적인 투기에 가까운 투자행위 했다가 예측이 어긋나 옵션 가치가 휴지가 될 때는 그의 목이 달린 성과 평가에 치명적임을 물론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편 콜 옵션은 풋 옵션과는 반대로 이것을 살(매수할) 경우 미래 만기 시점까지 시장가격이 행사가격을 초과하면 그 차이만큼 이익을 보는 금융상품이다. 이 콜 옵션을 팔면(매도하면) 콜 옵션 매수자의 상대방으로 가격 차이만큼을 미래 지급할 의무를 지는 것으로, 이 의무 때문에 매수자가 지급하는 콜가격 또는 콜 프리미엄을 매도 즉시 수취하며 매도자에게 이익이 발생한다. 콜 옵션의 기초자산 시장가격이 행사가격 근처나 그 이하에 머물게 되면 콜 옵션 매도자는 그 프리미엄을 이익으로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시장가격이 갑자기 많이 상승하면 매도자는 가격 차이에서 이미 받은 프리미엄을 제한 금액을 매수자에게 지급하면서 손실이 발생한다. 옵션의 매도는 이론적으로는 무한대의 위험을 부담해야 하므로 시장가격을 정확히 예측할 능력을 갖춘 기관투자가가 주로 활용한다. 한편 합성 선물은 이상 설명한 콜 옵션과 풋 옵션과 선물 간의 수학적 관계를 이용하는 것으로 옵션을 동시에 사고팔아서 선물 포지션에 투자하는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
5월 25일. 오늘 아침은 지난 3월 천안함 침몰에 이어 북한에서 전군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미디어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덕분에 다리에 힘 풀린 노인네 무르팍처럼 주식시장이 아침 시작부터 턱 하니 주저앉은 것이다. 정말 제이슨의 정보력이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펀드 투자 때문에 북한을 감시하는 인공위성을 수천억 원 들여서 미리 쏘았을 리는 없고, 그냥 감으로 투자하기에는 고만해가 알기에 제이슨은 너무 합리성을 숭배하는 인간이었다. 고만해가 싱가포르 연수에서 고역을 치른 이유도 고만해의 사고와 행태가 합리적이지 못해 은행원으로는 위험하다는 제이슨의 지적 때문이었다. 은행원이라면 채권 금리의 거래 호가인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예측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사고하고 정확하게 행동할 것을 제이슨은 요구했다. 다시 그때를 생각하는 순간 고만해는 치가 떨렸다. 그렇게 독일제 인쇄기만큼 한 치 빈틈없이 4원색을 합성해내는 제이슨이었다. 고만해가 아는 한 제이슨은 원인이나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합리성 그 자체를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얼토당토않은 투기에 가까운 투자 포지션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든 사실 고만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가 굳이 알려주지 않는데 알겠다고 우기면서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오후 2시로 접어들자 주가는 더욱 밀려서 -4% 언저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모니터에 게시된 대부분 주가의 색깔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러나 제이슨의 투자 포트폴리오의 평가액은 아침부터 빨아올린 이익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 시장 투자자의 99%는 아마 주식에서든 선물이나 옵션에서든 지난 천안함 피격에 이어 다시 한번 수몰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금융 거래소 시장은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각자의 꿈과 능력으로 경합하는 곳이다. 제이슨은 그들의 엑기스를 용서 없이 빨아들였다. 디~디~ 업무용 전화가 날카로운 수신 벨을 울린다. 전화의 작은 모니터를 보니 제이슨이었다. 따로 정한 규칙은 없지만, 그는 제이슨의 전화를 조금 기다렸다가 세 번째 울림 후에 받았다. 수화기에서 자신감에 찬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 GO. 다음 투자 주문을 파일로 보냈어요. 바로 주문을 걸어 줘요. 투자 투자 포지션을 바로 청산해서 수익을 확정해야 해요.”
“주가는 더 밀릴 것 같은데요. 바로 정리합니까?”
“북한 뉴스는 예정에 없던 이벤트이에요.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손실이든 이익이든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 불확실성 그 자체가 위험이지요. 한국은 북한 위험과 재벌 리스크 때문에 항상 가격 계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어서 제값을 못 받고 할인되고 있는 거 알지요? 코리아 디스카운트 말이에요. 불확실하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거예요. 나 같은 큰돈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금기이기 때문이지요. 안타깝지만 한국인들의 선천적인 노력과 천부적인 재능에 비하여 이 지정학적이고 경제 구조적인 핸디캡은 극복하기 쉽지 않을 거야. 오늘 시장은 내 투자 포지션에 유리한 방향이었지만 반대로 풋 옵션을 매도하거나 옵션을 양매도 해서 스트래들(straddle) 매도를 걸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지요? 안 그런가요? 고 팀장?”
고만해는 제이슨의 자신감이 역겨웠다.
‘빌어먹을 놈이 많이 먹었으면 됐지, 한국 시장 가지고 시비야’
이렇게 고만해는 일갈하고 싶었지만, 혹시 들킬까 생각의 노트를 얼른 닫는다. 제이슨의 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점쟁이가 아니고 엔지니어이에요. 미스터 고. 잊지 말아요. 모든 우연을 고려해서 계산하고 투자 전략을 실행해야 해요. 옵션을 탄생시킨 블랙-숄즈 공식은 노벨상을 받았지요. 투자는 정보와 확률의 과학을 기반으로 한 공학이지요. 그런데 이런 한반도의 빈번하게 일어나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우리의 계산을 방해하니 감점 요인이지요. 미스터 고. 명심하세요. 사실 오늘 같은 경우는 사전에 한반도에 있는 당신이 도와줬어야 해요. 거기 앉아서 뭐 해요? 밥값은 해야지요. 난 고 팀장에게 대접할 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평가하기에 프리 라이더(free rider ; 무임승차자)가 되면 곤란해요. 오늘 같은 날은 항상 촉을 세우고 있다가 어떤 조짐이나 위험이 있다고 비슷한 실마리라도 보고하려고 노력해야지요. 안 그래요?”
고만해는 다시 한번 머리에 맴도는 반항을 입으로 나오지 않도록 꾹꾹 누른다.
‘내가 CIA나 북한 공작원이냐? 말도 안 되는……. ’
그러나 이 말 대신 그의 ‘갑’인 제이슨이 좋아할 만한 대답을 뱉는다.
“알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항상 촉을 세우고 있겠습니다.”
“어찌 됐든 오늘은 운이 따라 줘서 해서 다행이에요. 다른 한편으론 한국 시장의 불안정은 매력적일 수 있지요. 불안정이 만드는 변동성은 같은 편이 된다면 큰돈이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본격적으로 배팅을 키워 갈 거니까 지원을 잘해야 해요. 알았지요? 빌어먹을. 회사가 실적 관리 때문에 난리에요. 올해 목표를 채우려면 투자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아무튼 이제 올해 중반에 들어가니까 미스터 고가 정신 바짝 차리고 도와줘야 해요. 아 류 오케이?”
제이슨 통화가 종료되고 스마트 폰의 통화화면이 꺼졌다. 제이슨이 고만해의 청각 범위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뇌리를 누르는 무게감이 아직도 남았다.
‘이 친구가 이런 탐욕스러운 속내를 보이는 것은 첨 보는데. 이제 나이 먹으니 돈 생각이
나는가 보지? 얼마나 큰일을 내려고…’
고만해는 제이슨의 욕심이 그에게는 나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일을 만들어 가는 규모나 속도, 규모가 그가 예상하는 이상이어서 덜컥 겁도 좀 나기는 했다.
(포식자 7)
2016년 유럽의 권위 있는 한 주간지는 제이슨이 일하는 글로벌 은행 프로이센에 대해 분석했다. 기사 제목은 “어떻게 독일 은행업의 지주는 길을 잃었나. How a Pillar of German Banking Lost its Way”였다. 이 글에는 프로이센 은행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프로이센은 유럽의 부유한 한 국가를 기반으로 150년 가까이 역사를 쌓아 온 은행이다. 이 은행은 그 국가의 국민 성향인 신뢰와 안전을 구현하는 지역 은행으로 JP모건, 골드만 삭스 등의 글로벌 투자은행과는 성장 배경이 달랐다. 이 주간지는 그 나라 국민은 프로이센 은행에 대해 신망이 대단히 높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프로이센 은행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고와 함께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낙숫물 효과(Trickle down)로 대표되는 레이거노믹스와 빅뱅으로 요약되는 영국의 금융 자유화는 소련연방의 붕괴 후 자본주의 경제의 오만함과 결합하며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특히 세계금융시장은 충분히 자기 스스로 자율적으로 일탈하지 않고 작동할 수 있다는 맹신 속에 규제 철폐, 자유화가 추진되었다. 최대 금융시장인 월 스트리트와 런던, 영미권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금융 자유화, 금융 개방화가 거부할 수 없는 추세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 금융 세계화의 핵심은 바로‘증권화’였고 이것을 투자은행(investment banking) 비즈니스가 주도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세계화 흐름에 프로이센 은행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증권화’란 돈으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문서화하고 증권으로 인쇄하여 사고팔아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비즈니스다. ‘증권화’는 이른바 한계가 없는 사업영역으로 그야말로 상상력이 한계인 - 금융과 사기의 경계가 무너진-비즈니스이다. 투자은행업자의 주장은 세계화가 연출하는 신경제에 걸맞은 금융 비즈니스를 구현해야 하고 이를 통해 주주가치를 최대한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인 금융자산, 부동산을 사고팔던 은행원이 이 투자은행업 처지에서는 뒤처져 보였고, 전통적 상업은행 업무를 노동집약적이고 저수익 비즈니스로 평가했다. 프로이센 은행은 극한 위험을 부담하며 이익을 극대화하는 투자은행업의 성장에 신뢰, 안전이라는 가치관을 장애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 변화로 프로이센 은행은 투자은행으로의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 영미계 투자은행 출신 인력을 영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2년 영미계 CEO가 등장했다. 프로이센 은행처럼 막대한 돈을 쌓아 놓은 금융회사를 만난 투자은행 출신 CEO는 극도로 흥분했음이 틀림없다. 투자은행업은 막대한 자본을 빌리거나 자금력이 있다고 보증받을 수 있으면 그 자본 규모의 수배 또는 수십 배의 레버리지를 일으켜 위험 자산에 투자하고 높은 기대 수익을 노리는 금융 비즈니스라고 요약할 수 있다. 투자은행은 레버리지로 마련된 자금으로 위험 자산에 직접 투자하여 직접 투자 이익을 얻거나, 투자한 위험 자산을 금융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보수 또는 수수료를 수익으로 발생시키는 방법으로 회사 이익을 누적시킨다.
또한 투자은행업은 될 수 있으면 자기가 위험을 부담하지 않고 거래에 관련된 위험을 시장에서 중화하거나 거래 상대방에게 넘기는 투자 구조를 선호한다. 한편 금융상품은 위험이 높은 상품일수록 그것을 보상하는 위험프리미움으로 금융소비자에게 제시하는 수익성이 좋다. 금융소비자가 위험을 최대한 인지하지 못하고 구매 당시 자기가 안전하면서도 수익을 확보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최고의 금융기술이고 비법이다. 이러한 금융기술은 고도의 수학과 금융기법을 활용하는데 거래 상대방은 남녀, 노소, 개인, 법인, 인종, 국적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이 활용하는 선진 금융기법, 금융공학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그 파생상품들은 투자은행 주주가치 극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금융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투자은행업자에게 프로이센 은행은 갈증 없이 무한 탐욕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이며 16세기 포토시 은 광산을 발견한 에스파냐 정복자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프로이센 은행이 150년 쌓은 건전 은행의 이미지는 국제무대에서 투자은행 프로젝트를 벌이는 데 신용보증서 기능을 했다. 프로이센 은행은 이후 무지막지한 행보를 보이며 망가졌다. 2006년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영업에 뛰어들어 금융위기의 주범이 되었으며 다양한 국가에 진출한 금융업에서 법과 상거래를 무시한 사기와 불법을 벌였다. 이 과정에 2002년 등장한 투자은행업 출신 CEO가 있었고, 그는 프로이센의 법률상 이사회, 감사위원회 기능을 무력화한 경영위원회를 편법으로 운영하며 은행에 투기, 사기를 조장했다. 이러한 프로이센 은행의 진화 과정에 제이슨과 고만해가 있었다.
(개미지옥 1)
5월 25일 새벽 5시. 이영현은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실눈으로 보니 파란 새벽 여명이 방안 구석구석 더듬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방안 전체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누워서 천정을 올려 보다가 기상나팔 소리라도 들은 이등병처럼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어젯밤 취침에 든 시간은 12시 너머였으니, 4시간 반 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영현이라는 인간의 굴레를 다시 쓴 것이다. 이영현은 32살 아직 잠이 맛있을 나이라서 그런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늘 버겁다. 그는 일어날 때마다 힘들다고 외쳐보고 싶지만, 그가 스스로 선택한 굴레라는 결론에 이르면 조용히 굴복하고 일어난다. 그가 떠났던 4시간 반 동안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노트북 PC에 전원을 넣자 블룸버그, 마켓 워치, 로이터 등 뉴스 웹 사이트들로 잔뜩 치장한 모니터가 창백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이곳저곳 새벽 서핑을 하며, 지난밤 미국과 유럽,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시장 뉴스를 샅샅이 살핀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배팅하려면 철저히 조사해서 시장 방향을 알 수 있는 단서를 그는 찾아야 했다. 이영현은 오늘 다시 실수한다면 이번엔 틀림없이 끝장일 거라고 다짐한다.
(개미지옥 2)
이영현은 여의(如蟻=개미 같은) 증권 수유지점에 근무하는 주식 브로커 담당 과장이다. 그는 입사 7년이 되어서야 조금은 늦게 과장이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주식투자 동아리를 통해서 주식에 입문했고, 그는 증권회사에서 개최하는 주식 수익률 게임에서 여러 차례 입상 경력도 있어서 한때 주식투자 선수들 사이에서는 신동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여의 증권에는 대학 4학년 시절 인턴으로 채용되었다가 졸업과 동시에 수상 경력을 인정받아 특채됐다. 그러나 주식 브로커의 현실은 이영현이 꿈꾸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모의 투자 게임에서 가상의 돈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과 영업을 통해서 타인 즉 고객 돈을 펀딩하고 그 자금을 투자 관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마 한겨울에 난로의 따뜻함을 손가락을 펴서 고루 느끼다가 그 난로 속으로 손을 넣는 것만큼 그가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은 극적으로 달랐다. 현장에서 그가 경험하기에는 투자자는 과학적일 수 있지만, 브로커를 상대하는 고객은 신학(神學)적이었다. 고객은 브로커를 만나는 순간 자기에게 적용될 기대 수익과 승률은 확연하게 높아져야 하고, 실패 확률은 비약적으로 감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고객이 브로커로부터 기대하는 기대 수익의 확률 곡선은 대칭 모양의 종형 정규분포 곡선이 아닌 오른쪽 높은 기대 수익률 쪽으로 중심이 크게 기울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고객의 요구가 불합리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대부분 브로커는 이러한 고객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고객을 관리할 기회를 잃기 때문에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삐뚤어진 - 통계학에서 왜곡(skewness)이라고 하는 - 기대 수익 확률분포에 의존한 브로커와 고객 간의 서비스 계약 문화는 단지 고객의 일방적인 탐욕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증권 산업의 - 확장하면 금융 산업의 - 경영 구조와 상호 작용을 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 증권회사는 회사 내부에서 철저한 브로커 간 경쟁을 통해 영업 수익을 올리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회사는 본부장, 지점장을 닦달해 브로커들의 수수료 실적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또 일일, 주간, 월간 단위로 실적이 부족한 브로커에게 압박을 가한다. 브로커는 물론 그들의 상사까지 보수, 성과보수, 인사고과 모든 것이 수수료 약정에 연동되도록 설계되어있다. 증권회사 브로커들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된다.
증권회사는 합법적이고 제도화된 그럴싸한 금융회사로서 직원이 자본주의 사회생활에서 최고 수준의 신용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신분을 제공하고, 사회적 생존을 위해 그런 회사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 브로커는 회사의 영업 정책을 교리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오직 수수료와 약정을 올리기 위한 행동에 그들의 인생과 가치관은 매몰된다. 사실 그렇게 순응하는 사람들만 조직에 살아남는다. 일반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간혹 시장이 폭락하거나 무리한 실적 올리기를 위한 편법 영업과 횡령이 드러날 때 증권사 직원들이 목숨을 버리고는 한다. 그들이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수수료와 실적이 삶의 이유가 되도록 오랜 세월 세뇌됐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 일시에 사라지는 이벤트가 발생하면 그들은 존재할 방법과 이유를 잃는다. 결국, 이러한 환경에서 브로커는 생존을 위해서 공격적이고 약탈적이며 회사나 자기 성과보수를 위해서는 법이나 도덕은 뒷전으로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영업 행동이 몸에 밴다. 회사도 이런 브로커들을 늘 칭찬하고 인센티브로 격려하며 조직의 본보기로 삼는다.
한편 증권회사가 갖는 철저하게 배금(拜金)적인 영업문화는 금융회사의 주주가치 극대화에 원인이 있다. 좀 더 나아가면 주주가치 극대화가 자본주의의 전술적 윤리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세계 최대 금융시장을 가진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자본의 국제이동, 금융 규제 철폐라는 금융 빅뱅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금융 자본, 국부펀드, 연기금, 글로벌 펀드가 급격하게 성장했고, 이것들이 투하자본 이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유령처럼 전 세계를 떠도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금융 자본이 세계 각국의 기업에 투자하며, 당연한 순서로 주주행동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철저한 주주가치 극대화 기업 윤리가 강요되었다.
15세기 신대륙을 발견하며 세계 식민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던 주식회사 제도와 20세기 세계화된 금융 자본이 결합하며 형성된 지구촌의 자본주의 가치사슬은 기이한 모습의 약탈자를 탄생시켰다. 선진국의 부자와 노동자가 만든 연금펀드가 후진국의 기업들의 주주로서 주주가치 극대화를 강요하며, 이들 기업의 고용자를 통제하는 글로벌 먹이사슬은 이중 삼중으로 중첩된 대리인들을 통해 도덕성, 인간성을 배제하는 더 강력한 자본 축적과 이익 추구가 가능해졌다. 특히 금융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금융 산업은 다른 어느 산업보다 비즈니스 모델에 주주가치 극대화를 꽃 피웠다. 주주의 이익 극대화와 미소를 위해 증권회사 경영진은 영업문화와 경영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한다. 증권회사에서 주주와 경영진, 직원의 공통 이해는 수수료와 약정 실적의 극대화이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통해 주주는 배당을 경영진과 직원은 성과보수와 신분보장을 챙긴다. 이러한 증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수수료와 약정의 원천인 고객 확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신기루에 불과하다. 직원인 브로커에게는 수수료를 생산할 고객 확보가 365일 미덕으로 강요되고, 이에 따라 직원인 브로커는 고객을 유인하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수익률 확률분포를 고객에게 제시할 동기가 주어진다.
이러한 확률분포를 맛본 고객은 다시 브로커에게 최소한 같은 것을 요구하고, 브로커들은 고객 유치를 위해 점점 더 기울어진 확률분포로 다른 브로커와 경쟁한다. 한편 일단 기울어진 수익 확률분포로 거래 계약을 체결하면, 브로커가 이를 충족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표준편차를 훨씬 더 높여서 투자하는 것이다. 표준편차는 평균치에서 실제 발생하는 사건의 값이 얼마나 내려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통계치로 투자론에서는 이것을 ‘위험’으로 해석한다. 표준편차가 커진다는 것은 평균 기대 수익률에서 큰 폭으로 +가 될 확률과 -가 될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즉 현실의 정규분포곡선은 표준편차를 높이면 고객에게 닥칠 위험은 커진다. 무엇보다 2008년 금융위기처럼 예상할 수 없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손실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세계화된 자본이동의 시대에는 철저하게 투하 자본 이익률을 따라 움직이는 핫머니에 의해 각국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커지고 빈번하게 흔들린다. 늘 큰 위험을 감수하며 공격적으로 시행하는 브로커의 고객 투자 관리는 시간과 횟수가 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경우 고객은 오래 생존하기 쉽지 않고, 증권회사의 준법 담당 부서에는 손실 보상 민원과 소송전이 늘 줄을 잇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왜곡된 확률분포 영업문화는 투자의 레버리지와 회전율을 높이기 때문에 증권회사에는 득이 된다. 고객이 원한다는 명분으로 증권회사와 브로커는 고객들의 탐욕을 경영이익을 위해 방조할 동기를 가진다. 증권회사의 교육용 언어로는 장기 안전 투자가 자산관리의 정석이라고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그들은 완전히 태도를 바꾼다. 장기 투자는 증권회사의 주주가치 극대화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배치되며 이익경영에는 완전히 독이다. 증권시장에 발을 들인 대부분 고객은 높은 위험 추구 문화 속에 결국 단명하게 되고, 증권 산업을 기름지게 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대부분 고객은 증권시장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입체적으로 결합한 탐욕의 제물이 되고 또 많은 경우 고객 스스로 탐욕에 이끌려 마루타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증권회사의 우수한 브로커는 든든한 재목으로 처음 투자를 시작한 고객을, 그들이 원하는 회전 속도로 탐욕의 선반에 걸어 아주 작은 이쑤시개로 깎아 내는 기술자들이다.
이러한 현실을 깨닫기 전까지 이영현은 주식 모의 투자 게임에서 배운 정통 투자론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투자 관리를 했다. 신중한 위험 관리로 포트폴리오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데 주력했으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객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주식투자 고객들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했고, 고객들의 마음속에 신념으로 자리 잡은 기울어진 기대 수익 확률분포 곡선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미 주식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은 고객은 기본적으로 공격적 투자와 큰 변동성을 선호하는 위험 선호 고객이었다. 주식 브로커 사이의 격언에 ‘하락하는 장에서 손해를 보는 브로커보다 상승하는 장에 먹지 못하는 브로커는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은 이영현도 전통적인 투자론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수수료와 약정 실적이 늘면서 늦게나마 승진도 하게 되었다. 이영현이 근무한 7년 동안 투자 후 1년을 넘도록 살아남은 성공한 고객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근무한 지 약 4년 정도가 지나면서 수료와 약정 실적이 늘어 회사의 인정은 받기 시작했으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영현에게 자산을 맡겼다가 실패한 -그중 상당수는 어릴 적부터 그를 신뢰했던 가족, 친척, 친구, 친지였으나 이제 원수가 된 - 고객이 쌓이면서, 무리한 수익 약속을 했거나 도덕적, 양심적 이유로 고객들의 손실을 상당 부분 그가 떠안아야 했다. 지금 그는 월급 중 2/3 이상을 이들을 위해 매월 분할 방식으로 변상하고 있는데, 그의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렇게 엉망이 될수록 이를 벗어 나기 위해 그는 실적 성과보수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주식거래에서 레버리지가 크고 수수료 수입도 짭짤한 파생상품 거래로 영역을 옮기게 되었다. 그는 3년째 파생상품 고객들을 중점 관리하고 있다. 주식보다 훨씬 변동성과 레버리지가 큰 파생상품시장에서 이익을 빨리 보기도 했지만, 가끔 찾아오는 시장 변동 때마다 발생하는 손실은 눈덩이처럼 증가하며 그가 부담할 금액은 더 증가했다.
이런 생활을 7년째 끌어오면서 그의 투자 관리 계좌는 대부분 부서져 사라졌고, 관리다운 관리를 하는 고객 계좌는 원금이 12억 원 정도 되는 나름 큰 파생상품 전용 투자 계좌 하나만 남아 있다. 이 계좌는 전임 지점장이 직접 관리하다가 이영현이 넘겨받은 것으로 전임 지점장은 2년 전 고객 계좌 횡령으로 고발되어 회사를 그만두고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 지점장은 2003년 초반부터 시장이 상승세를 탄 이후 파생상품이 구조화를 통하여 월 1%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으로 고객을 유치했다. 그는 파생상품의 수수료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새로운 지점의 수익원으로 펀드만 거래하던 안정 성향 고객들을 월 1% 수익을 거의 보장한다고 무리한 약속을 하고 파생상품 투자 고객으로 유치했다. 이후 수년간 수유지점의 실적은 전국 지점들의 수위권을 유지했고 담당 본부장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그 이후 2007년 금융위기 서막이 닥치면서 증권시장이 조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파생상품을 이용한 월 1% 이익 지급형 상품은 오히려 손실이 발생하며 이익 지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관리하던 계좌 중 가장 큰 계좌는 고객이 해외에 거주 중이었는데, 투자 손실이 커지자 이를 메꾸기 위해 고객 재산을 임의로 일부 인출하여 다시 투자하고 일부는 수익금인 것처럼 고객에게 약속한 이익이라며 송금했다. 그러나 손실이 계속 불어나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고객이 자기 계좌의 손실 내용을 확인했고 지점장을 공금 횡령으로 고발하게 된 것이다. 그 전임 지점장이 구속된 후 남아 있는 고객 중 가장 규모가 큰 고객을 이영현이 관리하게 되었다. 이영현에게는 주전 선수가 유고 되어 귀한 기회를 잡고 등판한 투수처럼 귀한 고객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귀한 기회를 얻었으나 이 고객과의 인연이 비단길은 아니었다. 전임 지점장과 함께 이 고객은 최초에 5,000만 원을 원금으로 파생상품 투자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익이 쏠쏠하게 나자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노다지가 보이는 것 같았고, 전임 지점장의 - 유혹과 - 권유로 투자원금이 12억 원까지 늘렸다. 이후 연이은 투자전략의 성공으로 수익금을 합친 그의 파생상품 투자 총자산이 최고 30억 원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올해 3월 천안함 폭침 전후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짐에 따른 투자전략의 실패가 있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것은 이영현 과장이 고객의 거래주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거래 프로그램 조작 실수가 겹치면서 파생상품의 계좌 평가액 잔액은 17억 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예측 불가능한 시장 외적 요인은 어쩔 수 없겠으나 긴박한 분위기에 긴장이 지나쳐서 거래 프로그램의 버튼 조작을 잘못하여 큰 손실을 발생시켰다. 고객은 주가가 일시적으로 폭락했을 때 지금 막 주문 낸 것만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영현 과장은 계좌 전체 계약을 청산하는 실수를 했다. 파생 계약이 잘못 청산된 후 주가는 다시 반등했고, 만약 그대로 잔액을 유지했으면 상당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지나간 2년간 이영현이 밤잠 못 자며 전전긍긍 계좌 관리에 쏟은 노력과 정성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이영현은 이 고객에게 완전히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고객들의 셈법은 자산이 최고 수준이 되는 순간 그 금액이 자기의 뇌리에 있는 계정 원장의 원금이 된다. 본인이 낸 순수한 원금이 12억 원이었고, 아직 17억 원이 되어 있으니 5억 원의 수익을 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계좌 평가 금액이 최고 30억 원이 된 순간 그 금액이 계좌의 원금이고, 이영현은 13원 억을 까먹은 무능한 브로커로 낙인찍힌다. 이영현은 볼모로 잡혀 있는 고객 계좌에서 탈출하는 것이 지금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도전이다. 그가 새벽부터 분주하게 컴퓨터와 씨름하는 이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