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이 오기를 기다린다
외서 검토를 하느라 한동안 저녁 산책을 다니지 못하다가 어제 오랜만에 혼자 산책을 다녀왔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염색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선선해서 아파트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밖에 나오니 집에만 박혀있을 때에는 알아채지 못한 계절 변화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지난주에는 분명 단풍잎이 달려 있었는데 일주일 만에 집 주변 나무들이 이파리를 떨구고 있었다. 길바닥에는 이미 노랗다 못해 흙색으로 변해버린 나뭇잎들이 수북했다.
그런데 앙상한 나뭇가지를 조금씩 내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빨간 열매를 맺은 나무가 보였다. 화려한 꽃을 피운 아이들도 보였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이 아니었나? 생각해보니 한 겨울에 산책할 때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나무를 보았던 것 같았다. 하긴, 제주에서 만나는 동백꽃도 11월에서 1월 사이에 가장 예쁘게 핀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나는 다시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도 그동안 해온 불안 훈련 덕분에 내가 지금 조급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이렇게 불안을 컨트롤하는 방법은 불안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요즘 하고 있는 외서 검토 일은 재미있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받았다는 기쁨과 행복이 분명 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외서 검토만 받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된다. 동시에 내 검토서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번역 실력이 줄어드는 건 아닐지, 샘플 번역의 기회는 언제쯤 주어질지, 출판번역가로 언제쯤 데뷔할 수 있을지도 걱정된다.
조급함이 올라오고 내가 나를 괴롭히려 할 때면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 나의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것이 아니듯이 나도 기다리면 꽃을 피울 때가 올 것이라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실력이 되면 그때 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아직은 때가 아니니 현재 맡은 일에 충실하자고 스스로 말해준다.
산책하는 시간은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을에 피우는 꽃을, 겨울에 맺는 열매를 보며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
그래, 나의 계절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언젠가 분명히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