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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16. 2023

샘플 번역에서 떨어졌다

그렇지만 슬프지 않다. 다음을 준비하면 되니까.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일부일 뿐 내 전부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번에도 샘플번역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첫 역서를 계약했을 당시 샘플 번역을 내고 바로 다음날 합격 연락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번역 파일을 낸 지 이틀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니 아무래도 떨어진 게 분명하다.


작년 겨울, 처음으로 샘플 번역에서 떨어졌던 날이 기억난다. 최종본을 제출하고 일주일 후쯤 안타깝게 다른 역자님이 이 책 번역을 맡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마음이 저릿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책과 사랑에 빠졌던 모양이다. 내 이름이 저자 이름 옆에 박힌 그 책을 서점에서 만나게 되는 상상을 하며 행복한 백일몽에 빠져 있던 나는 7일 만에 꿈에서 깨어났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내 것이 아니었음을 마주했을 때 충격은 실로 컸다. 처음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맨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지’였다.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선택받지 못했다며 자책했고, ‘나는 역시 안 되는 건가’라며 내 잠재력을 성급하게 깎아내렸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대학원까지 졸업했는데 이렇게 영영 출판번역가로 데뷔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이어져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큰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렇게 속상해하며 보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샘플 번역에서 떨어진 것은 내 작업물이 타인보다 부족했을 뿐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내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샘플 번역 단계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떨어진 이유는 번역 퀄리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출판사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의역을 했는데 직역을 선호하거나, 나는 한글로 풀어썼는데 한자어로 간결하게 번역하길 원했다거나), 단가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움츠러들 필요도 한없이 좌절하고 있을 이유도 없다.


나는 항상 그랬듯 최선을 다해 번역했다. 번역에 떨어졌다고 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고 또 곱씹으며 번역했고, 어떤 조사가 나을지, 이 단어와 술어는 호응이 맞는지, 행어 독자 입장에서 내 문장을 어렵게 느끼지는 않을지 고민했다. 한 선배 출판번역가는 프리랜서인 출판번역가에게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에, 한 단어나 문장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고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벌이가 줄어드니까. 하지만 나는 내 여유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더 고민하면 더 좋은 표현이 나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사실 나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 번역가이니 선배 번역가님들이 쉽게 번역할 표현도 나는 한참을 붙잡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샘플 단계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이렇게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분명 이것들은 내 몸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크게 연연하지 말 것. 


번역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생긴 나의 신조다. 노력의 정도는 내가 바꿀 수 있지만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믿으니, 이제 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받게 될 때 물론 마음은 아프지만 예전처럼 며칠씩 끙끙대지는 않는다. ‘나보다 원문을 더 잘 옮겨줄 번역가를 찾았나 보다’, ‘내 번역 스타일이 출판사가 원하는 바와 달랐나 보다’, ‘나보다 이력이 돋보이는 번역가에게 맡겼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일에 속상해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툭툭 털고 일어나 내게 찾아 올 다음 기회를 잡기 위해 씩씩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수많은 책 중에 내가 자신 있게 번역할 수 있고, 나와 번역 스타일이 맞고 단가까지 맞는 책이 분명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린다. 허송세월을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매일 필사를 하고, 표현을 모으고, 동료들과 스터디를 하고,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 소설을 직접 번역해 보면서,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며 나의 때를 기다린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필사에 집중했다. 한참 전에 번역 수업의 강사님이 내신 역서를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데려왔는데, 한동안 일을 하느라 읽지 못했다. 지금 시간이 생겼을 때 그분의 책을 원서와 함께 비교하면서 공부 목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원문을 보며 내가 번역을 하고, 옮기기 어려웠던 부분을 체크해 놓는다. 그러고 나서 역서와 비교한다. 그렇게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실력을 쌓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가능한 많이 오래 하고 싶다. 그러려면 몸의 체력도 필요하지만 마음의 근력도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지 않도록, 금세 지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잘 다독이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실망스러운 결과가 생겼더라도 너무 많이 실망하지 말고 자책하지 않기로, 슬픈 마음은 인정해 주되 너무 함몰되지 않기로,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기로, 그렇게 다음에 내게 찾아올 소중한 기회를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로 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내게 주어지기를, 내가 그 기회들을 잡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 마음이 변치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온마음을 다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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