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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04. 202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책과 함께 펼쳐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좋은 탓이다.

하루키가 그려내는 도시의 설명을 따라 내 안에 지어지고 맺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은 탓이다. 내가 상상하는 그 도시는 그 어떤 누구의 도시도 아닌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 더욱 그러하다. 아마 다른 이가 먼 훗날 이 책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하면 그가 그려낼 도시는 내가 본 도시와는 아주 다를 것이다. 그 도시는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거대한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소설들을 가장 사랑한다.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심상을 사용해 상상해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살면서

그런 구차한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책이 궁금하면 유튜브에서 책의 해석이나 평론을 찾아 읽는다고 한다. 누군가가 씹어 넘겨주는, 그래서 굳이 내가 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세이나 자기 계발 관련 책들이 강세라고도하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좋은 소설이 주는, 상상할 것이 가득한 그 세상이 좋다.

일흔이 넘은 하루키가 아주 오래전 썼던 단편을 다시 끄집어내더 쓰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감탄에 감탄을 한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가 있지...? 부럽고 부러웠다.




주인공은 마흔다섯의 남자다.  곧 마흔다섯이 되는 나는 그가 겪는 일들을 반은 부러워하고, 반은 나 자신을 투영하며 책을 읽었던 듯하다. 그는 열일곱의 첫사랑 이후로 삶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듯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마치 중년의 위기를 겪듯이, 자신의 그림자와 작별하고, 열일곱에 자신이 창조한 도시에 살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간다. 하루키가 서른 초반에 쓴 글을 삼십여 년이 지난 일흔한 살에 다시 쓰며, 주인공은 마흔다섯이다. 하루키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의 간극을 잊은 듯이 그 시절을 살아내는 것일까. 마흔다섯의 인간이 지당하게 느껴야 하는 감정들, 가져야 하는 생각이나 경험들이 오롯이 그에게 있고, 마흔다섯의 그가 동경하며 바라보는 열일곱의 그도 마치 아스라한 환영처럼 그곳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하루키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었을까.


그림자와 나는 동일한 존재인 동시에 다른 존재이다. 때로 나는 주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그저 누군가의 그림자일 수도. 내 실체는 보이지 않는 벽의 너머 도시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는 융을 생각나게 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가졌으나 결국은 나와한 몸이라는 해석 또한 마음에 들었다. 결국은 나의 한 부분인 것을.


모든 것이 아스라한 아지랑이처럼 불확실하다. 어느 것도 선연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무엇이 확실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가장 확실한 것은 삼십여 년 전 몸에 남았던 기억, 강렬한 체취, 그때 들었던 생각, 나의 과거의 기억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과거에 집착한다.


주인공이 떠돌던 열일곱의 기억을 따라 걷다 보면 내 잊었던 열일곱이 생각난다. 열일곱의 주인공과 열여섯의 소녀는 여덟 장이 넘어가는 긴 편지를 서로에게 끊임없이 써단다. 이메일을 보내지 않던 시절을 나도 살 때가 있었더랬지. 하며 어느새 깜박 잊었던 시절을 기억해 낸다. 문구점에서 예쁜 편지지를 고르는 것이 일과였던 시절이 있었지... 하며 그때의 나를 기억해 낸다. 잊었던 나를 기억하게 해 준 하루키가 고마웠다.

그때 그토록 썼던 편지들을 복사해서 어디엔가 남겨둘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새삼 아쉽다.

그때의 나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풍성하게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었던 걸까.


하루키의 소설을 거의 모두 보았지만, 이 책은 개인적으로 내게는 그의 나이와 연륜이 가장 느껴지는 책이라 해야겠다. 혹은,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의 글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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