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Apr 24. 2023

Tár, 타르

영화 <타르> 리뷰


케이트 블란쳇 아닌 타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케이트 블란쳇을 위한 영화였다. 

블란쳇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블란쳇은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블란쳇이 아닌 타르만 보이는 연기. 그녀의 연기는 다른 레벨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전 세계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블란쳇에 대한 찬사가 거의 모든 리뷰나 영화제의 시상평의 가장 첫 줄을 차지한다. 오스카가 비록 미셸여(양자경)에게 돌아갔지만 그것은 올해는 반드시 유색인종에게 주연상을 줘야겠다는 오스카의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양자경의 연기가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타르라는 매력적인 영화에 담긴 블란쳇의 연기는 이 캐릭터로, 이 연기로 상을 타지 않는 것이 더욱 말이 되지 않아 보일 뿐이다.


블란쳇의 매력적인 연기와 더불어 영화는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두 번 기꺼이 구매해서 볼 정도로 복선처럼 깔린 이미지와 심상들이 가득했다. 


리디아 타르는 세계 최초 베를린 필하모닉을 리드하는 여성지휘자이다. 미국 출신인 그녀는 베를린 전 빅파이브-뉴욕, 보스턴, 시카고, 필라델피아, 클리블렌드-를 모두 지휘한 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그의 마지막 숙원과도 같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그녀의 이력은 진짜 완벽하다. 다 가졌다. 



타르는 항상 남성정장처럼 차려입는다. 영화 초반부 그녀는 LP판을 바닥에 깔아 두고 음악을 선정하는데 마지막 선정한 LP판에 새겨진 지휘자와 똑같은 턱시도를 맞춰 입는다. 그녀는 '여성'이지만 '남성'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블란쳇의 큰 키는 갖춰 입은 남성정장과 함께 혼란한 타르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준다.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위층에 있는 육식동물이 아래계층의 동물을 잡아먹듯이, 음악계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라는,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그리고 단 하나뿐인 여성- 지휘자라는 사실은 타르에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힘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는 계층 가장 아래층에 위치한 젊은 음악인들을 사냥한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처음 몇십 분 동안 끊임없는 혼란을 느꼈는데, 바로 타르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데서 오는 혼란이었다.  숭고하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격정적으로 지휘하는 천재 지휘자, 사람들을 향해 환하고 순수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는 사람, 사회적 명망이 있는 인정받은 공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여성 지휘자들을 후원하는 아코디언의 공동 후원자인 여자 지휘자- 

영화의 반이 지나도록 이 사람은 포식자인가 그저 순수한 예술가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여성인데?' 하는 내 선입견은 타르를 포식자로 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여성이 여성을 사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라고, <타르>의 중심이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권력의 부패한 본질”을 겨냥한다는 케이트 블란쳇의 인터뷰도 이에 부합한다.

 

그 인터뷰를 보고서야 그러게, 맞네-했다. 만약 타르가 리디아가 아닌 남성으로 표상됐더라면, 나는 영화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그의 곁에 서 있는 어시스턴트 프란체스카와의 관계에서 풍기는 미묘한 힘의 역학을 파악했을 것이고, 나는 5분 만에 이 영화는 음악계에 숨겨진 추악한 권력관계에 대한 영화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타르의 주변을 맴도는 여성들을 보면서도 나는 타르가 레즈비언인지조 차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우리의 인식체계가 그 미묘하게 다른 파장을 알아내는데 덜 발달한 탓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내는 사람이 포식자, 악인일 수 있다는 것에 내 무의식이 거의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듯도 하다.


타르는 반여성적이라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공감한다. 타르라는 캐릭터 자체가 자신을 '여성'으로 보는 세간의 시선을 부정한다. '마에스트라'라고 불리기보다 '마에스트로'로 불리기를 원하고, 서슴없이 딸을 괴롭히는 학교의 아이를 '흔히 남성들의 방식' 혹은 조폭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협박으로 해결하며, -그 와중에 자신을 '아빠'라고 소개하는 건 덤이다- LP판에 담긴 지휘자의 옷을 베껴입듯 사회가 말하는 남성성을 답습한, 여성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남성이나 다름없는 타르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이해의 충돌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뉴스에서 자주 보이는 "두 얼굴의 목사 혹은 선생"- 겉으로는 자선봉사를 하는 듯했던 좋은 얼굴의 성직자나 사람들이 사실 알고 보면 오랫동안 범죄를 저지르거나 성추행을 일삼았던 포식자였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선한 얼굴을 한 권력'만큼 무서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영화는 왜인지 설명해주지 않지만 타르는 크리스타라는 젊은 여성지휘자를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크리스타가 프란체스카에게 보낸 여러 이메일 중 하나의 제목도 "Tar wants me dead(타르는 내가 죽기를 바라)"이다. 크리스타는 타르가 공동후원자인 젊은 여성 음악인 후원단체인 아코디언의 후원을 받았던 촉망받던 젊은 지휘자이지만 결국 자살하고, 그녀의 자살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 타르를 베를린 지휘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잠깐이지만 매우 친밀했던 둘의 사이는 모종의 이유로 멀어지고, 그 후로 타르는 집요하리만치 크리스타의 앞날을 방해했다. 그녀가 삭제한 여러 개의 이메일들의 내용에서 우리는 크리스타를 매장하다시피 한 타르의 방해를 볼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녀는 그토록 집요하게 크리스타를 매장시키고자 한 걸까?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간단하게 그저 크리스타와 연애를 했고, 더 이상 그녀를 보기를 원치 않았던 타르가 그녀를 매장하고자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 그녀가 엘리엇과 아코디언에 대해서 나누던 이야기가 복선처럼 들렸다. 여성 지휘자만 후원하던 아코디언을 이제 젊은 남성 지휘자까지 확대해서 후원하자던 타르의 말- 어쩌면 그녀는 유일무이한 여성지휘자라는 그녀의 지휘가 흔들리기를 원치 않았고, 크리스타가 자신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녀를 매장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아코디언을 희생자를 찾는 도구로 사용했을뿐더러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육성하려 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매장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영화는 여러 이미지의 대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새로 뽑은 첼리스트인 올가는 베를린의 게토에 산다. 타르가 사는 초럭셔리 맨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지역- 포르셰를 몰고 올가를 데려다 주려 그 지역에 가 있는 타르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리고 타르는 보이지 않지만 환청처럼 들리는 올가의 목소리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개를 만나 피하려다 넘어져 크게 다친다. 

먹이사실의 육식동물도, 가장 지하층의 환영과도 같은 이들로 인해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복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연습실 옆에 사는 병과 가난에 찌든 모녀- 그리고 마지막 타르가 도착한 필리핀까지. 아시안으로서 마지막 필리핀 장면은 약간 짜증이 났다. 이 백인 남자 감독 기껏 사용한다는 심상이 필리핀이냐 뭐 이런 심정이랄까. 백인 여성 엘리트 계급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가는 곳이 필리핀이라는 설정은 뭐 백인들에게는 통할런지 모르겠지만 아시안으로서는 짜증이 나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필리핀에 바로 도착한 후 시차를 이기려 마사지를 받고자 했던 타르는 의도와는 다르게 돈으로 여성을 살 수 있는 마사지방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필리핀 어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후 자기도 모를 역겨움에 구토를 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타르가 누군자 전혀 알지 못하는 필리핀 여자아이의 시선에서 타르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타르는 말론 브란도의 영화로 인해 필리핀 내륙까지 들어왔으나 달라진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악어처럼 필리핀이라는 척박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것인가?

영화는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섬진 산책, 공지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