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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pr 20. 2023

섬진 산책, 공지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오랜만에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었다. 미국에서 한국책을 받아볼 수 있는 한국 도서판매 웹사이트에 무언가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었던 해외결제 관련 규정이 생긴 이후로 도통 한국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누군가 빌려줘서 공지영 씨의 책을, 마치 갓 지은 따듯한 밥 한 공기 같은 느낌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밥알을 한알씩 음미하듯 읽어 내려갔다.

에필로그를 읽다 말고 책을 잠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였지"하며 새삼스럽게 감탄해야 할 정도였다. 어쩜 내 나라의 내 언어는 이렇게 정갈하고 소담할까. 첫눈을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처음 발자국을 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언어가 바삭거렸다. 읽는 내 눈 안에서, 우물거려 보는 내 입 안에서.


사실 책 제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고 '섬진산책'은 부제목 정도로 책표지 한편에 작은 글자로 적혀있는데 왜인지 내게 책 제목은 섬진강이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았다. 섬진강이 책의 정서를 크게 잡아주는 물줄기였고, 그녀가 많은 위로를 받는 공간이었기에.


한국책을 읽은 지 오래된 내게 공지영 씨의 에세이는 이십 대에 읽었던 그녀의 또 다른 여행에세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나이 마흔 즈음-지금의 내 나이와 겹치는 시기-에 그녀가 방문했던 수도원들에서의 경험과 그에 대한 단상을 적어 내려 간 <수도원 기행>이 그것이다. 

내가 <수도원기행>을 얼마나 많이 읽었었더라... 그즈음의 나는 막연한 봉쇄수도원에 대한 동경과, 그녀의 글이 주는 묘한 공감이 얽혀 그녀의 이 여행에세이를 몇 번이고 정독하듯 읽었었다. 고단했던 내 이십 대에 지금도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위로를 받았더랬다. 종이의 질감과 사이사이 들어있던 컬러사진들이 아직도 손가락 끝에서 기억으로 살아난다.


소설도 참 좋아하지만 나는 공지영 님의 에세이를 더욱 좋아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두 번째 이혼 이후 종교에 다시 귀의하면서 그녀는 신을 찾아 나섰던 것 같다. 그러면서 신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수도원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유럽에 있는 여러 수도원들을 방문하면서, 그중에는 봉쇄수도원-평생 독방에서 정해진 일과 이외에는 기도만 하는 그런 수도원-도 방문했었다. 굳게 닫힌 수도원의 문 안쪽에서의 삶이 힘들지 않으냐고 수도원에 사는 수도승에게 물어보니, 닫힌 안쪽에서 눈을 반짝이며 수녀가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나는 더 큰 세상을 만난다고, 나는 더없이 기쁘다, 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당연히 오래전에 책은 읽어버렸기에 다시 들추어볼 수도 없다. 그러나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기억은 여러 번 읽었음에도 참으로 희미한데, 이상하리만치 이 봉쇄수도원 안에 거하던 수녀와의 짧은 대화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일까, 나는 그 수녀의 행복이 부러웠던 것일까.


그러부터 이십 년 정도가 흘러 내가 미국에 오고 사느라 바빴던 사이 공지영 님 또한 숨 가쁘게,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섬진산책에 나온 달라진 그녀의 짧은 인생 요약 문장에서 그녀의 이십 년을 함축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지난 이십 년도 그녀답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 사는 내가 그녀를 '보았던' 기억은 뉴스 포털에 몇 해 전 갑자기 바쁘게 오르내리던 그녀의 이름이었다. 한국 미투 운동과 관련한 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후맥락을 잘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기도 했고, 언론의 어투나 당시 분위기로 보아선 그녀의 이름이 거의 난도질당하는 수준이었다. '아.... 사람은 모두 변하는 것인가?' 정도로 생각하고 나는 다시 무감해지기로 노력을 했더랬다. 


무감해지기로 했던 사람의 에세이를 읽고 있자니 몇 해 전 무감하려 했던 내가 괜히 멋쩍고 미안하다. 가만 보니 오래된 친구의 글을 읽듯 그녀의 에세이를 읽고 있는 탓인 것 같다. '그래, 이 분의 글로 인해 받은 위로가 얼마인데 내가 그렇게 무관심하려고 노력했던 걸까...' 하는 그런 미안한 마음. 오래된 친구,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던 친구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그렇게 섬진산책을 읽어 내렸다.


그녀는 이제 육십이라고 했다. 사기를 당했고, 그 새 한번 더 결혼을 했다 헤어졌다고도 했다. 한국에서 세 번 결혼과 세 번 이혼한 여성은 거의 세 번의 동일 전과를 지닌 남성 강간범과 동일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다고 쓴 부분을 보며 피식 웃기도 했다. 아마 사실일 것이고, 알고도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감행한 그녀의 용기가 아 참 공지영답다 싶기도 했다. 참고 살 사람이었으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이렇게 쓰지 못하지.


우울증을 심하게 겪고, 죽어야 할 이유가 서른 가지는 되는 그녀가 어떻게 하면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섬진강변의 집을 사고,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그곳에서 모차르트를 들으며, 나 자신을 더욱 신경 쓰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 쓴 글이었다. 이십 년 전 그녀가 동경했던 수도원 삶이 잠깐 묻어나기도 한다. 그녀는 여전히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것 같고.


책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연약하다. 아직 조금은 세상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묻어있기도 하고,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의 노력이 묻어있기도 하다. 죽을 이유가 서른 가지도 더 있다는 그녀가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과, 그녀의 후배들의 삶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삶, 진짜 쉽지 않구나, 하며 한숨을 쉬게 하는 부분도 여럿이다. 그리고 읽는 사람으로서 이토록 연약한 이야기를 써낸 에세이스트로서의 그녀에 용기에 찬탄했다.


우울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다. 독하도록 나를 먼저 생각하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이 특히 그렇다. 내 우울증은 한국사회에서 아들을 바란 집안의 장녀로 자란 데서 기인한 것도 많기에 그녀의 서사는 내 서사와도 만난다. 아들을 그토록 바란 집에 장녀로 난 나는 다섯 살 무렵 스무 살이 되면 남자아이를 어디선가 입양해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딸로 태어난 나의 존재의 미안함을 아들을 하나 키워냄으로써 상쇄하고 싶었던 다섯 살의 소망이었다. 마흔넷의 현재의 나는 다섯 살의 이 애처로운 계획이 소스라칠 만큼 서럽고 무섭지만, 나는 안다. 그 다섯 살의 나는 아직도 내 안 어디에선가 살아남아 매일 그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미안함에 나는 더욱 좋은 딸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내 존재를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게 만들기 위해 모범생, 착한 딸, 여성스러운 아이가 되어갔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내 목소리를 내지 않는 법을 더욱 자연스럽게 배웠고, 목소리를 내기보다 목소리를 죽이는 연습을 더욱 잘 해냈다. 연습은 삶이 되었고, 정체성이 되어 지금까지 왔고, 중년의 나는 오랫동안 목소리를 죽이다 보니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우울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나는 내 목소리를 찾으려고,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성대의 근육을 깨우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그런 내게 공지영 님의, 그리고 그녀의 후배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였다.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산 그녀가 조근한 목소리로 일러주는 그녀의 살아남은 비결 같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윤슬'이라는 우리말이 있는 줄 이 책을 통해서야 처음 알았다. '반짝거리는 물의 일렁거림'을 뜻하는 우리말 윤슬은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섬진강에도 가득했다. 아마도 엄마 아빠와 시골집을 갔다 돌아오는 길 잠깐 들러 쉬었던 섬진강은 참 느릿하게 흘렀지만 햇빛을 가득 안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가을 오후 햇빛은 강을 덥혔고, 윤슬을 가득 머금은 섬진강을 보는 나도 가을햇볕에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내 어릴 적 섬진강이 공지영 님의 글을 통해 마치 어제일인양 시간의 문을 열고 내게로 왔다. 아름다웠던 과거를 만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렇듯 한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나의 과거와 이야기를 만나는 과정이기도 한 듯하다. 공지영 님의 글을 통해 나는 끊임없이 나를 만났구나.


책은 자기전 침대에서 읽고 며칠만에 읽어내릴 수 있었다. 한국어책의 장점이다. 

책을 덮은 나는 왜인지 친구 하나를 읽은 듯 약간 허전하다. 밤마다 연약한 이야기를 나누어줄 친구가 있는 것은 참 큰 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지영 님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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