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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Mar 20. 2023

더 웨일(The Whale) 리뷰

인간이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 

-*스포일러와 줄거리가 있습니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이 사람, 내 세대에게는 익숙한 '미이라'에 나왔던 브랜든 프레이저가 난데없이, 뜬금없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더욱 회자되어 인생 역전 스토리를 좋아하는 오스카마저 손에 쥐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라는, 오스카 시작 전부터 남우주연상은 그의 것으로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의 인생 역전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거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이 더웨일, 고래, 인 것도 흥미로웠다. 모욕적인 의미로 우리는 종종 고래를 체구가 큰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심지어 감독은 대런 아로노브스키. 오스카가 사랑한 이 남자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오랜만에 나타난 그는 머리가 벗겨졌고, 하이틴 청춘스타 같았던 외모는 안타까울 만큼 사라졌기에, [더웨일]이 그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혼동을 느끼며 영화를 보았다. 




300킬로에 달하는 (272킬로인가 그랬던 것 같다. 파운드로는 600파운드) 지방 대학의 영어 시간 강사인 찰리는 남자친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유증으로 폭식증을 얻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욱여넣듯이 입에 몰아넣는 그는 어느샌가 300킬로에 달하는 거구가 되어, 자신이 사는 작은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고 워커나 환자용 휠체어에 의지한 채 생활한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심장은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는 간호사이자 친구인 리즈로부터 이번 주말까지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리즈는 병원에 가자고 찰리를 설득하지만, 찰리는 보험이 없다며 거부한다. 리즈는 오랜 기간 병원에서 퇴원 후 찰리의 집에 들러 찰리를 돌봐왔다. 알고 봤더니 그녀는 찰리의 남자친구였던 앨런의 여동생으로, 리즈는 오빠의 자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과, 동성애인과 사는 아들을 인정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가 속한 보수적인 교회를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며칠 남지 않음을 느낀 찰리는 9년 전 남자친구와 함께 떠나며 버렸던 딸인 엘리에게 연락을 하고, 돈을 주겠으니 자신과 며칠만 시간을 보내달라고 말한다. 양육권을 뺏겼던 찰리는 그동안 딸을 한 번도 보지도, 대화를 하지도 못했다. 

고등학생인 엘리는 반항적이고, 세상에 화가 나 있다. 이해할 만도 하다. 17살의 아이는 8살이었던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증오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독설로 상처 입히기만 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영화 후반에 죽어가는 찰리를 방문한 전아내 메리는, 자신이 그동안 키운 딸을 "evil"이라고 말하며, 아이를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찰리는 반복적으로 엘리에게 "You are so beautiful. You are amazing. You are perfect."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해 준다. 매우 미안해하며,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러나 또한 경외에 가득 찬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엘리는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에 처해있지만 몇 편의 에세이를 써오면 학교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이고, 영문학 강사인 찰리는 그녀의 에세이를 도와준다. 찰리는 반복적으로 "너의 솔직한 이야기를 써. 너를 써."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찰리의 상태는 계속 나빠져서 그는 결국 임종을 눈앞에 두고, 그 순간 엘리가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엘리는 자신이 8학년 때 (15살 무렵) 쓴 에세이를 아버지가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찰리의 심장이 멎어가는 순간, 찰리는 엘리에게 그 에세이를 자신에게 읽어달라고 이야기하고, 아이는 현관문을 활짝 열고 도망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에세이를 아버지에게 읽어준다. 영화 내내 답답하리만큼 작은 아파트는 창과 문이 모두 닫혀있는데, 이 순간 엘리가 활짝 열어젖힌 현관을 통해 환한 빛이 눈부시게 들어온다. 아이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스쳐 지나며, 찰리의 얼굴에 가득 내려앉는다. 아, 영화에 구원이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찰리는, 박히듯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서, 워커나 휠체어가 없이 아이에게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가오고, 엘리는 에세이를 읽으며 아버지에게 걸어 다가간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보고, 300킬로를 떠받치던 그의 두 발은 하늘로 떠오르며, 화면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차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는 엘리를 구원했고,

엘리는 찰리를 구원했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영화에는 토마스라는, 앨런이 다니던 교회에서 나온 어린 선교사가 있는데, 그는 사실 아이오와의 있는 집에서 쫓겨나 갈 데가 없어서 와이오밍 시골인 이곳에서 떠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녹음한 엘리는 오디오 파일을 토마스의 가족에게 보내고, 그들은 토마스를 용서한다. 토마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 이야기를 전해주러 찰리를 찾아오고, 찰리는 자신의 딸이 그런 배려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린다. 어떤 이가 보기에는 엘리가 토마스를 괴롭게 하려고 한 짓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토마스의 가족은 그 영상을 통해 토마스를 용서했고, 토마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


에브리씽에브리웨어 올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도 내가 보기에는 비슷한 주제를 가진 영화였다. 양자경이 연기한 에블린은 세계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 하나만을 구하고 싶어 한다. 더웨일의 찰리도 다른 이를 구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의미 있으려면 하나만은 잘했다고 여기고 싶었는데, 그것은 바로 딸 엘리가 자신이 멋진 사람임을 깨닫고, 남을 아끼고, 남들로부터 아낌을 받으며 세상을 나쁘지 않게 사는 것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만인가?

어쩌면 우리가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옆에 있는 그 단 한 사람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더 웨일]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이야기하고 있다.


토마스라는 그 어린 선교사는 아마도 종교의 위선적인 면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는 줄곧 찰리에게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신 것은 분명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는 결국 찰리에게 애정이 있지도, 그를 이해하고 있지도 못했다. 사랑이 없는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은 아름답다.

등장인물 모두가 상처 입고 부서진 사람들이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 중간에 찰리가 누구한테인가 - 아마 리즈였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한다.


"Humans are incapable of not caring." 

사람은 돌보는 것을 안할 능력이 없어.


아....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찬탄을 나아내게 만드는 그 한 대사. 그리고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한마디. 우리 모두는 돌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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