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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l 11. 2023

관용

마틴 로이드 존스의 빌립보서 강해(빌 4:5)

기쁨의 문제에 관심을 쏟았던 바울은 기쁨을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다루는데, 이 또한 그 요인 중 하나입니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심령의 상태에 주의하되 특히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주의해야만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주를 자랑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듯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여 주고 베푸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특징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명령들은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관용이 없으면 주 안에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완성되려면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4절이 5절보다 쉬운 것은, 4절은 주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하는 반면 5절은 주님처럼 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면서, 주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주님이 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기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5절은 더 어려운 일을 명령합니다. 주님을 그대로 재현해 내라는 것입니다. 5절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 복음 중에서도 가장 높은 차원의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환난 중에 기뻐하는 일보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도가 예외 없이 늘 하는 방식대로 여기에서도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는 교리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리의 전적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보다 딱한 이는 없습니다. 그는 4절에서도 단순히 "기뻐하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기뻐하되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도 사도는 단순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강력한 교리로서, 저는 이 교리를 주신 것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교리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아야 이 명령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관용을 베푸는 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주 안에 굳게 서 있는 자입니다.


"관용"에는 자신과 자신의 심령을 통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담긴 첫 번째 개념이 이것입니다. 관용은 자기 권리를 끝까지 꼬박꼬박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며, 중요한 것은 굳세게 지키되 그렇지 않은 것은 합리적으로 처리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내 몫을 최후까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필요하다면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주님을 위해 마땅히 누릴 권리까지 양보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영향을 받을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하거나 집착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관용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관용"은 쉽게 속상해하지 않는 상태, 즉 너그러운 상태를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쉽게 속상해하지 않는 것은 크고도 놀랍고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토아주의의 무심함이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상태를 옹호하는 말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용은 본질상 적극적인 특질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속에 있어서 어떤 공격도 잘 소화해 내며 그로 인해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속상해하지 않고 인내하며 견디고 오래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관용은 적극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들을 이해해 주며 그들의 행동을 변명해 주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기쁠 때에도 격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행복할 때에도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자기가 즐겁다고 해서 관용을 잃는 것이야말로 현대세계의 가장 뚜렷하고 안타까운 특징 아닙니까? 너무 좋으면 자제심을 잃고 정신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쁠 때도 자제해야 하고 슬플 때는 더더욱 자제해야 합니다. 아무리 슬프고 비통해도 절대 격하게 반응하면 안 됩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반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기쁨을 알고 슬픔과 비통함도 알지만 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활기찬 사람들입니다. 절대 시무룩하거나 침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스토아주의자는 그저 상황을 감내할 뿐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관용에는 활기가 있습니다. 현대세계에는 스토아주의가 상당히 만연해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자제력은 놀랍기는 한데 냉랭합니다! 활기가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제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제할 때에도 행복해하며, 기뻐할 때에도 관용을 보입니다.


우리 모두 이 관용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았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기질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들에게만 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성이 충동적인 사람도 모든 이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격이 다 제각각인데 그럴 수 있느냐고, 이것은 불가능한 요구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의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렇게 사셨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주님처럼 행하십시오.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까? 그 답은 실천을 통해,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서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 싸우고 주 안에 굳게 서 있으면서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대변하되 관용으로 대변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심령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고 드는 냉혹한 율법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부당한 대우까지 감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재판 없이 투옥된 데 반발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했습니다. 이처럼 부당한 대우까지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 말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는 점을 항상 분명히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거룩한 열심, 의로운 분노와 거칠게 비판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구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나 관용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용을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항상 모든 상황을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이 곧 오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한다면 60년, 70년, 80년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닌 주님이 심판자시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쉽게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가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심판자는 내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많은 문제가 절로 해결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도 심판받는다는 사실,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이 세상과 삶의 많은 일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처럼 하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이 다음과 같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 야고보의 말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7-9).


다른 말을 더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범사에 관용을 나타내십시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맥락에서 모든 삶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닌 주님이 심판자시라는 것을 안다면, 그가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해친 모든 자들, 여러분이 기도해 주었음에도 악으로 갚은 자들에 대해, 그 모든 죄와 악에 대해 원수를 갚으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과 영원토록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거하면서 그 앞에 있는 기쁨에 동참할 것에 대해 깊이 상고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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