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집 Jul 18. 2022

나비

그냥 엄마 #2

“동석아, 잘 봐. 밥 따로 소스 따로 전자레인지에 두 번 돌리는 거야. 다 돌린 다음에 컵에 붓고 섞는 거야. 알겠어?”     


“응. 알겠어”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며 동석이의 눈은 손에 쥔 휴대폰을 향해 있다.      


“동생 것까지 해줄 수 있지?”     


“알겠다니까. 다녀와, 엄마”     


민경은 동석에게서 못 미더운 듯 눈을 떼지 못하다 흘끗 시계를 보았다. 더 지체하다간 면접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      


“가윤이 잘 보고, 음식 뜨거운 거는 못 만지게 해. 알았지? 가윤아 오빠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민경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재빠르게 체크하며 한 손으로 핸드폰과 차 키를 챙겼다.      


“응, 엄마 빠빠이”   

  

이미 휴대폰 게임을 시작한 동석이 곁에서 가윤이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아홉 살인 동석이에게 네 살짜리 가윤이를 맡기고 집을 나설 때마다 민경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남매가 저녁으로 먹을 컵반의 사용법을 크게 적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고, 이미 주말에는 레시피대로 리허설도 해보았지만 역시 불안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시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평생 자그마한 숙박시설을 홀로 운영해 오신 친정엄마에겐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더 바라는 것이 없다. 민경의 늦은 학업 계획에 반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어떻게든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면접을 마치고 차에 돌아와 풀썩. 이제야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긴장이 다시 차오른다. 이런 건 설렘이라고 하겠지. '교수님들 질문도 많았고 대답도 잘한 것 같아. 긍정적인 분위기야.... 나 붙을 것 같아.' 남편에게 톡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다시 설렐 수 있다니...'


민경은 눈물이 핑 돌았다. 대학원에 붙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보다 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살면서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행복했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기대돼서 눈물이 났다. 어느새 도로에는 붉은 단풍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잠긴 목소리를 정비하고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 컵반 먹었어. 내가 가윤이 꺼 까지 돌려줬어."


"정말? 우리 동석이 진짜 기특하네. 역시 오빠다. 엄마 잘 끝났어. 이제 금방 갈 거야. 누가 벨 눌러도 택배일 테니 문 열어주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엄마가 도넛 사갈게. 사랑해"


집에 도착하니 가윤이는 까무룩 소파에 누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졸린 눈으로 다가와 폭 안기는 동석의 뒤로 난장판인 집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쏟아진 채로 굳은 소스 자국들, 쏟아진 물 위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수건과 조각난 색종이들.... 좀 전까지의 일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내가 사는 세계' 민경은 정신을 차리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겨 잠자리에 뉘었다. 


민경이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유난히도 길었던 지난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코로나로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거의 가지 못했다. 집 안에서 매일 같이 큰 아이의 줌 수업을 챙기고, 아이들 밥을 해 먹이며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챙기는 고된 시간을 보내고도 밤이 되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오늘 뭘 했지? 이 조그만 집 안에서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난 뭘 한 거지?''


아이들과 남편이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방 안에서 민경은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거나 불행하다거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 눈치 안 보고 아이들이랑 알콩달콩 집 안에서 부딪끼며 보내는 시간이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장난감 선글라스를 낀 채 장난감 마이크를 들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걸 보며 깔깔대고 웃었고, 부엌에서 한참 정신없이 식사 준비를 하다가 가윤이가 조그만 색종이에 엄마와 하트 그림을 그려 손에 쥐어주고 갈 때면 마음에 잔잔히 봄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민경은 자신이 한없이 하찮고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이렇게 '나'라는 사람이 아이들 곁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만 같아서 두렵고 무서웠다. 


몇 년 전 동석이를 낳고 민경은 다시 대학에 갔다. 처음으로 꼭 해보고 싶은 공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갓난쟁이 동석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놓고 강의실에서 이십 대 아이들과 나란히 수업을 들으며 민경은 '꿈'을 꿨다.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벌렁거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가슴속을 나비 한 마리가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대학 공부를 무사히 마쳤을 때 가윤이가 생겼고, 나비는 사라졌다. 정신없이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언젠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놓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가 그렇게 길고 무섭게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들이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마당에 하나도 아니고 둘을 밑길 곳이 마땅치 않아졌다. 그렇게 아이 둘과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도 익숙해져 갔다. 해가 뜨면 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에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게 행복이지 별건가 싶기도 했다. 밤이 되면 똑같은 익숙함이 민경에게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이러다 영원히 시작할 수 없을 거라고, 앞으로도 쭉 너의 인생은 이럴 거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진 다음날이면 집 안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마치 숨길 수 없는 민경의 속마음 같았다. 민경은 그것이 패배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기엔 내 인생이 아깝고 불쌍할 것 같았다. 그리고 민경은 덜컥 대학원에 입시 원서를 내고, 남편을 설득했다. 


"아이들은 내가 커버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간절하게 다시 시작된 대학원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버거웠다. 강의 첫날 민경은 가방 속에 들어있는 새 노트와 펜을 꺼내지 못했다. 다들 노트북을 꺼내 강의를 듣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노트북의 브랜드를 확인해 휴대폰에 'lg그램'이라고 적어두었다. 다행히도 학기 중에는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이 많았다. 아이들 저녁을 다 먹이고 나면 수업 시작까지 삼십 여분이 남았다. 민경은 그 시간에 재빨리 아이 둘을 씻기고 상을 치우고, 남편의 저녁상을 봐 두었다. 집안은 전쟁통이었고, 책상 밑에서는 가윤이가 다리에 매달려 스티커를 붙이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민경은 상의만 반듯하게 차려 입고 모니터 앞에 앉아 연극하는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다. 개인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한 인텔리, 혹은 이 분야의 전문가, 경험이 풍부한 강사.... 민경은 이 연극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으며, 점차 연기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졌다. 비록 책상 위와 책상 아래가 다른 세계관일 지라도 이렇게 상상하면 견디기 쉬워졌다. 아니 재미있었다. 

민경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짜릿하게 재미있었다. 학교 교실, 회사 강당, 도서관 세미나 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민경이 알고 배운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더 재미있게 말하고 싶어서 관련된 영화들을 찾아 나만의 강의 소스들도 만들고 이곳저곳 강의를 다녔다. 

'평생교육사'라는 일의 성격 상 강의 장소와 시간이 고정적이지 않다 보니 불시에 섭외 전화가 온다는 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다. 어느 때는 아이들을 강의 나간 회사의 건물 커피숍에 앉혀 놓고 휴대폰으로 만화영화를 켜주기도 했다. 


"동석아, 가윤이랑 만화 보고 있어. 엄마 이거 끝날 때 즈음 올 거니까, 아무 데도 가면 안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을 확인하고 플레이 버튼을 출발 신호처럼 누르고 강의 장소로 향하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이나 회사에 놀이방 공간이 있기도 해서 그곳에 아이들을 밀어 넣어 두고 나오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 대신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동석에게 미안하고, 수시로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덮쳐왔지만 이제는 되도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을 때면 '이건 어떻게든 내가 해야 돼. 그건 내가 해야 돼.' 라며 스스로 주문을 되내었다. 가끔 너무 힘들 때면 눈물이 났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밤, 방 안에서 흘리던 눈물보다 이 쪽이 훨씬 좋으니까. 이건 나를 살아있게 하는 눈물이니까. 


"엄마~ 강의 잘했어?"


휴대폰을 보고 있던 동석이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물었다. 


"응, 잘했어.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민경은 아이들을 챙기며 장 볼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