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란 속담은 적어도 연애시장에서만큼은 약발이 다했다. 성평등이 화두인 요즘 시대엔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다. 찍히는 쪽은 불쾌함을 넘어 공포를 느끼기 십상이고, 찍는 쪽은 잠재적 '미투' 사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찍히는 쪽이 여자고, 찍는 쪽은 남자라고 생각하셨는가? 적극적인 여성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수컷'이 먼저 다가가는게 자연세상의 이치이고 보기에도 좋다란 인식이 여전히 보편화 되어 있다.
초식남의 탄생(30대 후반)
빙속여제 '이상화'가 최근 '강남'과 결혼했다. 강남과 이상화의 관계가 연인으로 진전된 건 이상화의 고백 덕분이란 기사를 봤다. 강남은 이상화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고. 이에 이상화가 먼저 호감이 있다고 고백을 한 것이다. 직진녀 한 명의 용기로 두 명 모두 평생의 연인을 얻게 됐다.
싱글로 30대 후반쯤을 맞이하면 많은 남자들이 강남처럼 호감을 가진 이성(=이상형에 가까운)에 먼저 다가가는게 슬슬 어려워 진다. 상대방이 날 받아줄지 아닐지 촉이 안오니 그저 편하고 재밌는 오빠로 한동안 지내다 보면, 상대방은 어느 순간 새로 사귄 남친과의 연애문제를 내게 상담하기 시작한다. 돌이켜 보니, 내가 초식남(엄밀히 말하면 당시는 초식위주의 잡식남)의 세계로 진입한 게 그 무렵 같다.
초식남의 진화(40대)
초식남일지라도 그 나이엔 소위 꽂히는 여성을 보면 좋아하는 티를 팍팍내며 한 번은 찍어 본다. 그러다 몇 번의 거절로 자신감이 떨어지다 보면, 이상형(가령 SNS 에 'DM사절'이란 소개글이 많은 분들)과 잘 될 가능성은 '일도 없다'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그들에게 날 어필하는 방법은 간헐적 '좋아요' 정도? - 넘 자주 누르면 차단될 수도 있다. 눈이 아무리 높아도 이쯤되면 타협불가한 한 두가지 조건을 빼곤 나머진 순차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문제는 애매하게 호감이 가는 이성과 만났을 때다. 대화도 잘되고 나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아는데도 가슴에서 불꽃이 튀지 않으니 결국 머리 속이 바빠진다. '인생은 결국 혼자야'.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이 사람이야란 확신은 안드니', '어설프게 누군가 사귀다 진짜 사랑이 나타나면 어떡하지'란 철부지같은 생각들로 사슴같은 눈을 껌뻑이다 보면 꽃사슴으로 빙의된 40대를 보내게 된다.
초식남의 말로(50대 이후)
반백 싱글이 되서 앞으로 쓸지도 모를 도끼를 찾아보니이미 날은 녹슬었고 자루까지 썩어버렸다. 정작 필요할 때 자기 발등을 찍을지도 모른다. 이 단계에 이르면 '어느 정도' 호감이라도 갖고 있는 이성이 내게 먼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대시 자체를 안하게 된다. 비건(Vegan)이라 불릴만한 초식남의 막장! 클로렐라형 돌연변이 종(種)이다.
BGM) 우~~와 우와 우~와, 초식탐험 신~비의 세계~
연애시장의 공급불균형은 원래부터 초식성향이었던 여성분들 주변에 초식남들이 많아지면서 심화된다. 소가 말보듯, 그저 멀뚱 바라볼 뿐 서로 다가가질 않는다. 남자나 여자나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어 주면 덥석 잡아 줄 의향이 있는데, 켜켜이 쌓인 트라우마와 오랜 시간 혼자 지낸 관성이 상황을 꼬이게 만든다.
여자가 먼저 다가가면 이래저래 좋은 게 많다. 우선 손내밀어 준 여성 분이 맘에 안들어도 무서움을 느낄 남성이 상대적으로 적을테니 법적/의학적으로 안전하다. 직진녀의 용기는 직진남에 비해 희소가치가 높을테니 진정성의 측면에서도 더욱 귀하게 평가받는다. 양성평등을 앞당기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성이 먼저 대시하면 연애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이런 기회를 가벼운 만남을 위한 '쾌'로 생각할 나쁜남자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제 이런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만큼 성숙하다 못해 영악해졌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던지 그런 의도 자체가 내심 싫지 않다면 속아주는 척 즐기면 된다. 올드싱글에게 필요한 건 결혼보다 연애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연애나고 결혼낳지 결혼나고 연애낳냐!
초식남은 매력없다고? 걱정마시라! 그들의 핏 속엔 여전히 쥬라기 공원을 주름잡던 티라노의 유전자가 장강의 뒷물결처럼 도도하게 굽이치고 있다. 여성들이여, 일단 먼저 도끼를 들어라. 도끼질이 힘들다면 먼저 다가올 수 있게 신호라도 확실히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