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력과 당나귀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잘 살고 있는 듯하다가도 불현듯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고, '왜 신은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는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가 이런 시련을 겪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겨내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최근 본 영화 '카운트'는 88 서울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박시헌 선수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그는 당시 금메달을 땄지만, 전 국민이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을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유는 편파판정. 누가 봐도 결승전 상대인 미국 선수가 판정승을 거두리라는 것이 명백해 보였고, 박시헌 선수 본인 역시 자신이 졸전을 펼쳤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고 심판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의아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복싱밖에 할 줄 몰랐던 박시헌 선수가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계속된 비난으로 힘들어하다가 지도자로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영화 '카운트'는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흥행과는 별개로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명장면과 명대사가 존재했다. 바로 시헌의 베프로 나온 만덕(고규필 분)과 시헌의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만덕의 대사다.
만덕은 지능지수가 조금은 떨어지는 사내다. 누나가 운영하는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데, 항상 아이디어가 넘치고 생각한 것은 꼭 시도를 한다. (벌써 만덕이에게 한수 배웠다.) 이번에 만덕이가 시도한 것은 감기 걸리기. 만덕이가 항상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의미 있는 것을 하라며 핀잔을 주던 시헌은 감기에 걸리겠다는 만덕에게 다시 한번 핀잔을 줬었다. 그러던 만덕이가 실제 감기에 걸렸고, 어렵사리 재직하던 학교에 복싱부를 만들어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대회에 출전했던 시헌이 자신의 금메달 사건을 이유로 여러 프로 불편러들에 의해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해를 받게 되자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만덕을 찾게 된다. 감기에 걸린 만덕이는 시헌에게 보란 듯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만덕 : 내 뜨거운데 춥고, 씨게 아픈데 기분이 좋아
시헌 : 약 사무라
만덕 : 안 된다. 감기는 쫓아내는기 아이고 이기내는 기다.
시헌 : (만덕의 누나를 부르며) 누님 야가 열이 많이 나는가 헛소리를 하는데
만덕 : 그게 아이고 이 감기 걸린 거를 약을 안 먹고 이기내면 미역력이 세져
시헌 : 면역력
만덕 : 그레 맞다 그 미역력이 세져서 몸이 억수로 건강해진다 아이가. 그럼 그 씨잘데기가 있는 거잖아. 의미가 있다 아이가. 맞나 아이가.
시헌 : 니 와이리 멋있노
만덕 : 맞나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으며 강해진다. 만덕이가 말한 '미역력(면역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은 출구가 보이지 않고 해결책이 없다고 여겨지더라도 견디다 보면 '미역력'이 생겨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모이고,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한인회 단톡방에 매번 좋은 글귀를 올려 주시는 한 분이 이번에도 큰 울림을 선사하셨다. 바로 마른 우물에 빠진 당나귀 이야기다. 어느 날 늙은 당나귀 한 마리가 마을에 있는 마른 우물에 빠져 울부짖고 있었다. 당나귀의 주인인 농부는 깊은 우물에서 당나귀를 끌어올릴 방도가 없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당나귀가 이미 많이 늙었고, 꺼낼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며, 마른 우물도 어차피 메꿔야 한다고 농부를 설득해 결국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삽으로 흙을 퍼내어 우물을 메꾸기 시작했다. 당나귀는 쏟아져내리는 흙 때문인지 더 크게 울부짖었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흙으로 우물을 메워나갔고, 한참 지나자 당나귀 울음소리가 멎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나귀가 이미 흙에 파묻혔나 싶어서 우물을 들여다보았는데, 이때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당나귀가 쏟아지는 흙을 바닥으로 털어내고 조금씩 쌓이는 흙 위를 밟고 올라서서 점점 우물 입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나귀는 자신을 묻으려는 사람들이 퍼부은 그 흙을 역이용해서 결국 우물을 빠져나왔다. 스스로도 방법이 없고,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조차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모든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기만 한다. 그런데 그때 그 안 좋은 상황을 발판 삼아 일어날 수 있는,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난다. 바로 이 당나귀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홀로 난임 클리닉을 다니는 아내, 중국에서 홀로 일을 하는 기러기 남편. 같이 있고 싶지만, 같이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혼 생활의 반 이상을 아내와 떨어져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이다. 하지만 내가 그 당나귀라면? 기러기로 살면서 외로운 시간들이 계속되지만, 이 외로운 시간들을 역이용해서 더 빨리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 시간들을 견디고 버텨내고, 또 매일 무언가를 배우고 시도해서 만덕이가 말한 그 '미역력'이 생긴다면? 만덕이의 말과 당나귀의 일화가 나에게 찾아와서 깨우침을 준 순간 역전의 발판은 마련된 것 같다. 힘들지만 힘들어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흙을 털어내 그 흙을 밟고 땅을 다져서 올라서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