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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11. 2020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환멸의 섬, 제주도

제주도,

제주 라이프,

한 달 제주살이



현실에 지친 우리는 '제주도'와 관련된 단어만 들어도 마음 한쪽이 벌써 두근두근해진다. 하지만 제주 토박이 '현'씨인 내게는, 조상 대대손손 제주도민인 내게는, 제주에서 태어나 미성년자 생활을 제주도에서 몽땅 보낸 내게는 환멸의 섬이다.





대학은 꼭 서울로 갈 거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친구들은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꿈이 확고하다고 부러워했었나. 하지만 꿈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섬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기반을 둔 일이었으나 부러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친구들에게 진심을 터놓은 적은 없었다. 왜 내가 제주를 떠나고 싶은지, 그렇게 서울에 목매다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반반의 마음이었다. 제주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으니 소문이 퍼질까 우려하는 마음 반, 어두컴컴한 속을 보이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토해낼 것 같은 걱정 반으로.


집 근처의 고등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했다. 외고나 과학고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제주는 일정 이상의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다. 공부는 체력 싸움이라며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고기를 구웠다. 시내 인문계란 단순히 가까움의 문제보다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매일 준비된 아침밥은 부담감에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내신도 모의고사 점수도 안정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인문계를 포기할 정도의 성적도 아니었다. 결론적으로는 낙방했다. 한 문제의 차이였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로 나는 스스로를 가뒀다. 차마 가족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 방학 내내 따로 밥을 펐다. 내 몫의 반찬을 덜어내 방으로 들어서면 물을 마셔도 목이 막혔다.     





고등학교는 많은데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결국 한라산을 중심으로 정반대 편의, 기숙사가 달린 학교를 택했다. 버스로는 편도 3시간이 걸렸다. 기숙사는 주말마다 문을 닫았기에 나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마다 버스를 탔다. 집에서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20분이 걸렸으므로, 오로지 등교를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학교는 일반고로 전환된 지 3년이 지나지 않은 곳이었다. 소위 아웃풋이라 일컫는 성과를 위해서 학교는 공부하려는 새싹이 보이는 학생들에게 물심양면 투자하기 시작했다. 기숙사 배치 날, 우연인지 전교 1,2등과 같은 방으로 결정됐다. 사감은 나를 따로 불렀다.


“방 같이 쓴다고, 친구들 너무 귀찮게 하지 마.”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열일곱에 깨달았다.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전국보다 교내 싸움이 훨씬 쉬워 보였다. 그렇다는 건 친구들이 완벽히 경쟁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1등급이 되기 위해서는 4등 안에 들어야 했다. 주말이 되어 집에 도착할 때면 가방을 두고 곧장 독서실로 향했다. 여동생은 그런 내게 언니의 학교 때문에 부끄럽다고 했다. 설움이 복받치면 오기가 작동했다. 활활 타오르는 오기로 집중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타오른 불은 순식간에 내면까지 잠식했다. 유독 한국사에 탁월한 아이가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돈을 줄 테니까 공부하지 말라”는 제안을 건넸다. 마음씨 좋은 친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보고 수군댔다. 나는 용돈을 모아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복을 한 벌 더 샀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3등 안에 들어도 학교 소재지의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을 주지 않았다. 졸업식 날, 서울 소재지의 학교에 붙은 이는 나뿐이었다. 교문에 현수막이 걸렸지만 장학금은 다른 이에게 돌아갔다. 3년 내내 교문에서 아이들을 지도한 학부모의 덕이었다. 웃는 친구를 보며 다시는 이 근처로도 올 리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단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대학 진학 후에는 학업을 놓았다. 배움이란 대학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펜을 들 수 없었다. 펜을 든다면 밟아왔던 발자취와 같이 성적에 눈이 멀어 인간관계를 망칠까,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을 성취도에만 연연하며 애를 쓰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언제나 친구들이 득실댔던 반 아이가 떠올랐다. 성적과는 관계없이 사람 그 자체만으로 인정받았던 이였다. 당시 가식처럼 비쳤던 아이는, 사실 나의 우상이었다. 사랑을 받고자 공부한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잘못된 시야를 지닌 사람의 눈에 들어서 뭐 하겠냐는 태도를 지녔다. 가시 돋은 나를 안으려던 그 아이에게도 나는 모진 말을 했다.


상경 후, 뒤늦게 만나자는 연락을 청했지만 답은 없었다. 나 역시도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한 번 더 물을 수 없었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대했다. 방법은 우습게도 쉬웠다. 그간 내가 사람들을 대했던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는 찾는 이가 많아졌다. 제주와 달리 아무도 내 흔적을 모르니 가능한 일이었다. 즐겁게 지내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제주로 날아올 때면 초라해지고 만다. 얼굴 볼 이가 없으므로.


연합고사는 폐지됐다. 이제 고입에 대한 열등감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나까지 갉아먹게 되는 비참한 길을 따라올 후배는 없을 테다. 관광객들에게 제주는 환상의 섬이겠으나 내게는 환멸의 섬이었던 그곳. 사람들이 모여 일파만파 소문을 퍼뜨리고 고등학교 교복으로 서열을 매기던 제주.





공부하다가도 슬픔이 복받칠 때면 나는 그 길로 바닷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종종 울었다. 그 기억들은 지금도 생생하기에 하루아침에 환멸의 섬이 환상의 섬으로 바뀔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바라 왔던 제주에서 5년을 떨어져 지낸 바로 느낀 점이 생겼다. 평생토록 바뀌지 않으리라 확언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를 탓하면 슬퍼지는 건 현재일 뿐이니까.

그러니 나는 용서하기로 했다. 나의 고향 제주를.

언젠가는 내게도 환상으로 여겨질 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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