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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14. 2021

솔직한 얘기를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던데



댓글이 달렸다.


글을 찾아주시는 독자분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다. 일기에 쓰기조차 꺼려질 일을 열어 보인 용기를 칭찬해주신다. 온기가 담긴 마음을 받은 뒤에는 바로 감사하다는 답글을 남기지만,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사실 나는 큰 마음을 먹지 않고도 슬픈 얘기를 쓸 수 있다. 케케묵은 허언증에 관한 얘기더라도, 동정받을 만한 사건이라도.


부끄러운 얘기를 쓰는 게 왜 부끄럽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치부를 보이는 게 왜 쑥스럽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부끄러움을 너무나 오래 앓아서.


저마다 창피에 한도가 있다면, 나는 진작 다 써버린 게 틀림없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아프고 속상한 일이 많았다. 무슨 이유인지 세상은 어린 내게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고, 맨발로 풀숲에 들어가 숨죽여 울거나 기숙사 사물함에서 커다란 하마 인형을 꺼내 눈물로 적시는 날이 빈번했다.


지금도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다. 책을 많이 읽어서요,라 답하지만 사회의 쓴맛을 일찍부터 깨달아서다.


웃기면서도 슬프다는 뜻의 '웃프다'라는 말이 나온 뒤로 내 처지는 딱 그 단어로 설명됐다. 교복으로 서열을 가르는 제주에서는 명문 고등학교 교복을 한 벌 샀고, 평생 다리를 못 쓸 뻔한 국토대장정에서는 남자 친구를 얻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웃어넘겼다.


평정심을 탈탈 벌어 번 월급으로 잠시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가이드 없이 썰매를 타다가 절벽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설산에서 길을 잃어 동상에 걸릴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뻔뻔함은 빛을 발했다. '커피 값 아껴서 비싼 여행자 보험을 든 게 참 다행이야. 엄마한테 3억은 주고 가겠네. 이 정도면 나름 효녀군!' 하며 스스로 토닥인 기억이 생생하다.






글 쓰는 사람에게 에세이라는 장르는 못다 쓴 편지일 수도, 감정을 담은 일기일 수도 있다. 누가 내게 에세이를 왜 쓰느냐 물으신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답할 준비가 됐다. 지구에 남기는 유언이라는 마음으로 한 줄을 적는다.


세상에 서고 싶은 때보다 세상을 뜨고 싶은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쓴 에세이는 배설에 가까웠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감정을 적어두는 통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안 좋은 사람들 속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도망치고 싶은 기억 속에서 괜찮은 추억이 드문드문 있어 다리를 지탱할 힘이 생겼다. 눅눅하다 못해 찐득해진 글에 애정을 두고 가는 이름 모를 이들 덕분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서울에서 6년째 살고 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두 곳 다 집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지구에 잘못 착륙한 것 같은 기분인데(우주선을 타본 적도 없으면서), 처음에는 슬펐으나 스물다섯이 되니 깨달았다.


제주든, 부산이든, 서울이든, 강원도든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곳이 고향이라는 걸. 슬픔을 숨기고 살 필요는 없지만, 기쁨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걸. 괜찮다고 억지로 토닥일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괜찮지 않은 이유를 만들 필요도 없다. 부정이 오면 부정대로, 긍정이 오면 긍정대로.


나는 친구들을 자주 웃기는 사람이었고, 한때 코미디언을 꿈꾸기도 했다. 슬픈 일을 끊임없이 곱씹으면 그만 나를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부당 해고로 유배 가듯 제주로 떠난 여름방학이나, 대학생 때 미팅에서 꾸며낸 고등학교 신분 때문에 창피를 당하기도 했으나 웃어넘길 수 있다.


지금이 떳떳해서는 아니고, 누구에게나 벌어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곪게 두지 않고 열어 보일 용기가 여기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 한 편씩 글을 올릴 때는 쑥스럽지 않았지만, 살을 덧붙여 책으로 묶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내 삶을 어떤 식으로 규정해도 할 말이 없게 모든 것을 담았으므로.


그러면 뭐 어떤가, 당신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글의 역할은 충분히 다한 셈이다. 세상엔 슬픈 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간간이 우스운 일도, 힘이 나는 일도 있었다. 어쩌면 고통뿐인 사건에서도 웃음을 고르는 힘이 생겨서인지 모른다. 나는 잘 즐겼으니 이 책에 그 힘을 두고 간다. 그 힘이 반이라도 당신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 나와 당신은 기적처럼 같은 시기에 지구에 머무는 동료이기 때문이다.




독자님께 전하고 싶던 얘기를 프롤로그에 적었답니다. 곧 재밌고 톡톡 튀는 글로 돌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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