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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Feb 18. 2024

나대도 되나요?


열셋 일 때, 단짝이라고 생각한 친구로부터 작은 쪽지를 받았다. 어떤 재밌고 귀여운 메시지가 적혀 있을지 설레며 쪽지를 열었지만 쪽지의 내용은 기대를 완전히 져버린 까칠한 메시지였다. 단정하게 적힌 네 글자의 문장을 읽고 나는 숙인 고개를 차마 들어 올리지 못했다. 나대지 마. 그 말이 메시지의 전체 내용이었다. 아이들이 한둘씩 사춘기를 시작할 무렵, 사랑에 눈을 뜬 몇은 선생님 몰래 조용한 연애를 시작하던 때에 남자아이들과도 허물없이 놀던 나를 나무라는 말이었다.


서둘러 집에 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대다'의 뜻을 찾는 거였다. '깝신거리고 나다니다'는 문장은 어려워서 왠지 다가오지 않았지만 두 번째 뜻을 읽고 나니 단번에 이해됐다. 얌전히 있지 못하고 철없이 촐랑거리다. 연극 동아리에 들고 나서 목소리부터 몸짓까지 커다랗고 호탕하게 변한 나는 내가 생각해도 그 뜻과는 반대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대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들은 후 나는 완벽하게 바뀌었다. 선생님의 지목으로 발표를 할 때도, 아이들을 불러 모아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도,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문제의 답을 나 혼자 알고 있어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딘가서 나대지 말라는 친구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나대지 말라는 이야기는 오늘, 그러니까 지금까지 따라붙는다. 책이 곧 출간된다는 소식을 이곳저곳에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솔직한 의견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될 것 같다. 마음 가는 동료에게 자주 밥을 함께 먹자고 제안해서도 안 될 것 같다. '나대다'와 비슷한 단어인 '설치다'를 알고 나서 그렇다. 좀처럼 긍정적이게 해석할 수 없는 단어를 들은 후로 몸가짐을 신경 쓴다. 아무리 자기를 알리는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라지만, 사서 선생님들에게 묻지도 않은 명함을 내밀어야 강의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만큼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누가 나를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조언한 것도 아닌데 크게 떠들고 싶을 때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 개인 계정에 글을 올리는 일도 조심스럽다. 직장에 들어갔다거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혹시나 자랑처럼 느껴질까 봐 굳이 숨기고 싶은 아쉬운 소식을 들고 온다. 공모전에 떨어졌다거나 취업에 도전하지만 번번이 떨어지는 중이라는 문구는 이상하리만치 더욱 쉽게 쓰인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만 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존재한다. 번아웃에 따른 무기력과 불안을 어렵지 않게 내보인다. 여기 기다란 글을 올리는 일도 한참을 주저하다 발행한다. 혹시 쓸데없는 이야기로 귀한 독자님들의 시간을 앗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검열한다.


그런 내가 요즘 슬슬 다시 나대고 싶다는 마음을 느낀다. 개인 계정에 어느 장소에 놀러 갔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자연스럽게 술술 이야기하고 싶다. 책은 언제 나올 예정이고 나를 만나려면 어느 서점에 오면 된다는 정보를 샅샅이 말하고 싶다. 회사에서도 무례하지만 않다면 눈치 보지 않고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을 들고 임하고 싶다. 더욱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마음껏 설치고 싶다.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을 했을 때처럼, 주인공인 쿠키맨 역할로 리본이 달린 상자 밖으로 높이 뛰어올라 나타나는 모양처럼 나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만들고 싶다.


나대지 말라고 했던 친구는, 어떤 아이들과도, 심지어 무서워 보이는 선생님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내가 부러워서 그런 뾰족한 언어를 내밀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설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표현을 작은 쪽지에 힘주어 썼을 테다. 어쩌면 스스로를 나댄다는 단어에 맞추어 스스로 규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애썼을 수 있겠다. 코트 쇼핑에 실패해 마음에 들지 않는 코트를 입으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코트만 눈에 밟히는 것처럼, 그 아이 역시 자신의 선을 가까운 친구에게 들이밀었던 것 같다. 그때는 아이의 존재감과 권위에 주눅 들어 나대지 말라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벗어날 때가 왔다.


이십 년 가까이 나댄다는 이야기로 제동 장치를 걸어놓았으니 하루아침에 당당하게 내 생각과 의견과 자랑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천천히 설쳐보려 한다. 성심성의껏 쓴 글이 어딘가에 실려 조회 수가 늘면 며칠은 뽐내기도 하고, 구독자가 삼천 명이 되면 감사하다는 메시지도 편하게 전하고 싶고, 올여름 나올 책의 독자 교정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곳저곳에 퍼다 나르고 싶다. 선한 마음으로 쓴 이야기가, 누구를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존중하며 말한 이야기가 했다는 이유로 설령 나대는 사람으로 편협하게 낙인찍힐지 언정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대지 말라는 쪽지는 속상한 마음에 그날 바로 버렸지만, 종이는 없어져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제는 그 아이에게 닿지 않을 답장을 보낸다. 나 원래 나대는 아이야. 누구나 나대도 돼. 이 쪽지를 보낸 너도 나대도 돼. 그렇게 얌전할 필요 없어. 불의를 보면 나서서 주장하고, 마음에 드는 일이 있으면 손을 들어 기꺼이 붙잡는 능력을 지녀도 돼. 우리는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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