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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y 19. 2024

아무도 대신 정리해주지 않으니까


이전에는 눈을 뜨면 뭉친 눈곱을 떼고 곧장 세수를 하러 갔다. 지금은 마그네슘부터 비타민, 유산균과 이노시톨을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글을 자발적으로 쓴 날이 한참 전이다. 출근을 하면 써야 할 글과 보내야 할 답장이 있어서 집에 와서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불을 끄고 잠에 든다. 다음 날 일어나면 다시 또 비슷한 하루가 시작한다. 지하철을 탔다가 버스로 환승하고 숲길을 걸어 회사에 도착하면 어제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떤 소설을 쓰고 어떤 주제의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스치듯 사라진다.


할 일은 수북하고, 여러 일 중 하나를 없애면 두 가지의 일이 자라나는 느낌이라 당연히 매 순간이 벅차다. 심적으로 부담감과 중압감을 느끼자 몸에도 이상 반응이 하나씩 나타났다. 눈 밑이 떨리거나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져 물을 마실 때마저 약 맛이 났다. 피부가 뒤집어졌고 머리카락이 빠졌다. 지인들과 작은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주말에도 메신저를 켰다. 그야말로 일에 파묻히고 있었다. 에세이와 자연히 멀어진 이유를 이때 직감했다. 글을 쓰게 되는 원초적인 동기는 나를 찾지 않는 세상에 내가 여기, 이런 생각으로 앉아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인데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나를 찾고 있으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쉽게 가라앉았다.


밀려드는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 어느 날 밤, 이런 다짐이 섰다. 퇴사를 고민하고, 사업을 꾸리는 팀에서 빠지고, 동화 합평 모임에서 탈퇴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지방 소도시에서 종일 책만 읽고 글만 쓰겠다고. 돈 걱정은 당연히 들겠지만 일 년 정도는 그래도 괜찮지 않겠냐는 합리적인 마음이 나를 자극했다. 애인에게 그 계획을 밝혔다. 이것도 정리하고 저것도 정리하면 지금 나를 휘감는 스트레스에서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애인은 그러자고 흔쾌히 답하기는커녕 뜬금없이 정리를 하자고 했다.


내게 정리는 수건을 개고 청소기를 돌리거나 설거지를 하는 집 청소였는데, 애인은 업무에 있어 스위치를 끄고 켤 수 있는 정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소설 마감인 유월을 걱정하느라 오월을 어쩔 줄 모르게 보내지 말고, 유월 초부터 시작할 예정이니 오월에는 신경을 끄자는 식의 일정 조율이었다. 출근할 때만 회사 일을 하고, 퇴근을 했을 때는 낮에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말이 신경 쓰인다는 일련의 모든 업무와 관련된 일을 중단하는 것으로 정하자고 했다. 주말에 시간을 쏟는 사업도 토요일 오전에만 신경을 쓰고, 낮과 저녁에는 그 어떤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추라고 했다. 가만 듣고 보니 꽤 그럴듯했다. 모든 일이 내 휴식 시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적당히 분배하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기회에 왜 대표들이 비서를 고용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일정을 정리하고, 알려주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의 존재가 그토록 컸다. 일정이나 시간은 정리되었으니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다만 앞으로도 애인에게 내 업무를 어떻게 분배하면 좋겠냐고 매번 물을 수는 없어서 정리는 내가 해야 한다. 써야 할 글이 있다면 마감은 언제까지로 정하고, 토요일 낮부터 일요일 낮까지는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쉬어야 한다는 소소한 규칙을 계속 바꾸고 갈아엎으며 새롭게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에 이상 반응이 또 올 테고, 아침에 먹어야 할 약이 조금 더 늘어날지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명쾌한 답을 얻기보다 사는 게 이토록 어려운 건가 싶은 마음이 든다. 일이 많으면 기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든 걸 덮어두고 도망치는 것보다 맞서서 정리해야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걸 깨우친다. 변치 않도록 좋아할 거라는 향은 계절이 지나면서 서서히 바뀌고, 때때로 소설 한 권을 읽는 게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보는 것보다 어렵다는 걸 배운다. 당연하게 잘한다고 여겼던 무언가가 실은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다는 걸 알고 빠르게 겸손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줄 거라고 믿은 세계에 너무 기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세계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쏟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리가 필요하다. 하루는 확신을 가지고 정리를 하고, 하루는 확신을 내려놓고 생각을 열어둔다. 내일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번 정리를 했다면 다음 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일에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밤이 되면 자동으로 알람이 꺼지는 수면 모드처럼, 세상이 건네는 자극이라는 파도에 휘청이지 않도록 심지를 다지는 중심 모드가 필요하다. 요즘 다른 사람들의 중심 모드가 시작되는 시간이 궁금하다. 단순히 낮과 밤 중 어느 때에 집중이 잘 되는지를 넘어서는 얘기다. 어느 시간에 세상을 차단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는 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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