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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May 13. 2023

좋은 포기란 있을까

모든 일을 다 해야만 한다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습관처럼 하는 일. 파워 J형에게 '투두리스트' 적기는 아침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 다이어리를 펼쳐서 오늘 할 일을 조망하지 못하면 침대로 향하기 전까지 찜찜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내가 이렇게 투두리스트 적기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 직업인의 특성상,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기 매우 어려운 편이다. 집중을 하다가도 갑자기 오는 전화, 문자 등으로 집중력은 쉽게 흐트러진다. 그러다 보면 쉽게 일을 놓치게 된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혀를 끌끌 차며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거 참, 그래서 우선순위가 뭔데!"


누가 우선순위 모르나. 뭐부터 해야 할지 놓치고 헤맬 때마다 옆에서 거드는 남편의 말이 얄밉다. 이것저것 손대다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처음엔 글쓰기와 연관한 일만 했다. 다양한 일감을 받다 보니 어느새 분야가 확장되고 있었다. 욕망의 크기만큼 일도 불어났다. 넓어지는 네트워크와 늘어가는 일감. 대부분의 일을 수락하면서 원하는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잘못됐다는 걸 감지한 순간 이미 늦었다.


저녁 7시. 프로젝트 파트너, 그리고 남편 세 명이서 각자 테이블에 앉았다. 여행 예약한 손님들의 정보를 정리했다. 예약자 인원과 비용이 맞는지 연속 체크를 하고 새벽 3시가 되고 나서야 일이 끝났다. 사업의 확장을 통해 또 다른 기회가 생길 줄 알았던 건 큰 오산이었다. 


일의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포기할 것을 선택하지 못해 결국 다른 이의 손에 항해를 맡겼다. 

내 삶의 선장이 되지 못했던 게 속상했다. 


포기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해


안된다고 말하는 게 제일 어렵다. 평소 친구와 약속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분명 이번주에 마무리할 일이 있음에도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만사 제쳐두고 1호선 지하철을 탔다. '아니'라고 말하면 상대가 실망할 것 같았다. 그 또한 나에게 귀한 시간을 투자하는 건데 보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달까. 


처음만 어렵지 '안돼.' '아니'라는 말은 생각보다 쉽고 값졌다.


거절하지 못하는 삶을 살 때는 만성 피로를 달고 살았다. 잠을 못 자고 모든 일과 약속을 처리하는데 부지런히 살았다. 정작 제일 중요한 남편과 가족들은 뒤로 미뤄두고 말이다.



전략 디자이너인 그렉 맥커운의 <에센셜리즘>에서도 우리의 취약성을 꼬집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 목표와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 혼란과 스트레스, 좌절감이 크게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우선순위 없이 일, 관계에 욕심을 내다보니 스스로 성취한 것이 없었다. 


뒤쳐지는 건 이제 상관 없어


모든 것을 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가 범람하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늘어나며 '밈'을 쉽게 볼 수 있다. '밈(meme)'은 재밌는 말과 행동을 온라인상에서 모방하거나 재가공한 콘텐츠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용어이다.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밈을 놓치면 뒤처진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게 두렵기도 하고, 나만 모르는 것 같아서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 계속 인스타그램을 확인하는 나를 어느덧 보고 화들짝 놀랐다. 잠깐 봤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단편적인 예로 소셜미디어를 들었지만, 이 외에도 우리 삶에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판단의 피로감'으로 설명한다. 즉, 더 많은 판단을 내려야 할수록 판단의 질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뜻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덕목처럼 전해졌다. 포기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말을 믿고 삼십여 년 살았는데 지치다 못해 일을 지속할 힘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올해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린 포기한 게 아니다. 삶의 선택 기준이 달라진 것뿐.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된 어른이 된 것이다. 한정된 자원인 시간을 잘 쓰기 위해 탁월한 집중이 필요한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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