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일곱해의 마지막> 을 읽고 쓴 일기
나는 시인 백석을 잘 알지 못한다. 일곱해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짐작할 수 있을뿐이다. 김연수 작가는 2020년의 지금, 왜 하필 백석의 삶을 모티프로 소설을 썼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이 무언가에 저당잡혀 살고 있기 때문일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을 요구받는 시인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마음에 드는 처니와 연결해주겠다는 친구가 그 처니와 결혼을 해버리는 일을 지켜보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어렴풋하게 기행이 느꼈을 절망감과 슬픔을 추측해볼 뿐이다. 다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공감이 된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악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쇠의 세기 같아서일까.
다섯번째 시기는 지금도 이 땅위에서 존속되고 있다.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슬픔과 고된 노동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멸망케한다. 신들은 사람들에게 괴로운 시름을 보낸다. (중략) 사람들은 한번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으며 진실과 선행을 높이 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번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으며 진실과 선행을 높이 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성시를 무너뜨린다. 그 어디서나 폭력이 지배하며 교만과 힘이 높이 쳐진다. 양심과 공평한 심판의 여신들은 사람들을 버리고 말았다. 이 여신들은 하얀 옷을 입고 불사신인 신들을 향하여 높고 높은 올림포스로 날아 올라가고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거북한 불행만이 남아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에게는 악을 막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이 되었다. (171쪽)
'1958년의 기린'이라는 소절은 "기행은 시인이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기행은 불행에 이끌려, 기행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32)"이 시를 쓰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시 쓰기보다 번역으로 자신을 숨긴다. 기행은 "완전한 패배(116)"감에 젖어있다. 기행은 "모든 폐허에서 한 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164)" 시를 쓴다고 했다. 기행에게 시는 완전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발악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백석의 시가 아름다운걸까. 그런 기행에게 벨라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중략)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165쪽)
기행에게 벨라는 위로가 되었을까? 벨라는 기행에게 승리와 패배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난다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지금의 절망과 현재의 불행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곧 소망임을 말한다. 시인 백석은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실패한 불행한 인생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는 시인들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완전한 불행 속에는, 불행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이 숨어있다. 기행은 연약하고 순수한 말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김연수 작가는 여전히 무쇠의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불행 속에 감춰져 잘 보이지 않는 연약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기행은 스스로 자신을 비루함 속에 우겨넣고 있지만, 기행의 시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와 멀어진 삶을 사는 기행에게 순수하고 연약한 아이들의 동시가 읽힌다. 참 다행이다. 그 덕에 시대에 좌절하고 냉담해진 내가 스스로를 불행으로 우겨넣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운명에 불행해지고 병들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Ne pas serefroidir, Ne pas se lasser(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다정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