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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Aug 10. 2023

바로 얘예요, 아빠

인사해, 외할아버지다

아빠의 첫 번째 기일엔 가족끼리 납골당을 찾았습니다.

아빠의 두 번째 기일엔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은 산모였기에 아무 데도 가지 못했죠.

마침내 아기가 돌이 지나 세 번째 기일이 찾아온 여름,

아이를 데리고 엄마와 함께 아빠를 모신 곳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없이 화창한 여름이었고 운전하는 마음은 나들이 가듯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복직하고 일하랴 아기 키우랴 정신없던 와중에 주말의 혼잡함을 피해보겠다며 평일에 휴가를 내고 가는 길이었기에 더욱 그랬죠.

오늘 길에 점심은 뭘 먹을까,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카시트에 앉아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는 아기 앞에서 재롱도 부리며 소풍처럼 아빠를 모신 파주로 향했습니다.


그날 새로 모실 고인이 있었던지 검은색 근조 리본을 단 버스가 세워져 있는 정문을 지나 꽃을 사고, 아기 밥시간이 되어 휴게실에 내려가 점심을 먼저 먹이고, 아빠를 모신 방에 들어가 조촐하게 챙겨 온 술과 전을 펼쳐 놓았습니다. 유모차에 탄 아기는 난생처음 오는 곳이 신기한지 두리번대느라 정신이 없었죠. 엄마는 납골함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리며 한탄하셨고요. 여보, 외손주 왔어요. 세상에 이 애를 못 보고 가다니 이 애를.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프기 시작했을 때, 어렴풋이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아빠가 가신 후 언젠가 내가 외할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아빠를 찾는 모습을요.

영정사진에다 대고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려라, 뭐 이런 걸 하게 되는 건가 하고요. 그럼 애가 무슨 말을 하려나 생각하기도 했고요. 외할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어요? 하고 애가 물어보기도 하는 걸까 하고요.


현실은 아직 엄마아빠밖에 못하는 아기를 데리고 온 채였고 외할아버지는커녕 매일 보는 할머니도 발음하지 못하는 녀석을 유모차에 앉혀둔 채 저도 그 곁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봐봐, 저기 외할아버지가 계셔. 손 한번 흔들어 드릴래?

이게 뭔 소린가 싶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아기를 보며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 딸이 이렇게 외손녀를 낳아서 데려왔어요. 신기하죠? 앞으로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

지내도록 하늘나라에서도 신경 써 주세요, 하고 말하려는 찰나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생에 if를 대입시키면 삶이 피곤해집니다만 슬픔이나 고통이 일상을 파고드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게 되거든요. 살아 계셨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원래도 지나가는 아기들마저 예뻐 눈을 못 떼는 아빠였는데 자기 외손녀는 땅도 못 딛게 안아주셨겠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산으로 바다로 데려가 온갖 세상을 보여주려 했겠지. 우리 집이 아빠가 사다 나르는 아기 장난감으로 터져 나가 매번 그만 좀 사 오라며 볼멘소리를 해야 했겠지. 아침마다 밤마다 아기 사진 보내라며 카톡을 부단히도 보내셨겠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아쉬워하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얼마나 울었는지요. 아빠를 보내고 그만큼 울었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답답한 납골당에 이내 지루해진 아기가 조금 보채려던 차에 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죠. 미안해 아가. 엄마도 사실은 슬픈 일이 종종 있단다.


아빠, 보고 있어요?

우리 아가는 건강하고 잘 자라고 있어요.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고요.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엄마아빠뿐이고 맘마는 가끔 해요. 둘 다 일하느라 아기는 돌도 안 돼 어린이집 오전반에 보내요. 오후엔 엄마가 매일같이 아기 보시느라 고생이고요, 그래도 아빠 없이 홀로 적적히 지내시다가 아기랑 하루를 보내서 행복하다고 해주시니 죄송하면서도 다행이에요.


아빠,

아빠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 일상이 또 얼마나 달랐을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루어지지 않을 걸 생각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면 괜찮은데, 하나도 좋지 않고 슬프기만 하거든요. 아빠가 우리 아가를 안아 보는 상상만 해도 슬퍼서 눈이 뜨거워지니까요.

그러니까 같이 있지 못하는 대신 잘 지켜봐 주세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이요.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거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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