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술찜
남편과 나의 공통점은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금요일 밤의 술상을 기대하며 산다는 점이다. 세상 오만 가지 다툼의 근본이 되는 것이 술이겠지만 다행히도 부부가 즐기는 취향이 비슷하다 보니 술 문제로 다툰 적은 별로 없다. 평일에는 마시지 않는다던지, 다음 날 일찍 일어날 일이 있으면 자제한다던지, 이틀 연속 음주는 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우리 나름의 무언의 룰이 있다는 게 첫째. 그리고 안주와 주종의 취향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 둘째라 하겠다.
연애할 시절에는 이런저런 맛집이며 노포를 쫓아다니며 소주깨나 마셔댔지만 어느덧 집에서 함께 불금을 즐긴 지 7년 차, 우리의 취향은 해산물 안주에 화이트 와인으로 굳어졌고 다른 주종을 가끔 손대다가도 결국엔 뭐가 됐든 해물에 화이트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워킹맘이다 보니 평일에 손이 가는 메뉴는 먹을 수가 없어 회를 사든 찜게를 시키든 한큐에 끝나는 메뉴를 선호해 왔으나 그날은 하루 온종일 쉬던 금요일,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미뤄둔 집안일을 마친 후 가리비와 백합조개를 비롯한 패류 친구들을 주문해 오랜만에 시원한 조개탕 겸 술찜을 만들 계획이었다.
집에서 조개요리를 해 봤다면 알겠지만 모든 조개들은 기본적으로 손이 좀 간다. 손질이 다 되어 나오니 굽기만 하면 되는 생선과는 달리 씻어 줘야 하고, 종류에 따라 해감도 해 줘야 한다. 우리 부부는 웬만한 조개라면 다 좋아하지만 이번에 메인으로 선택한 가리비의 경우 해감은 필요 없어도 겉껍질에 붙은 게 많아 닦아주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국물 없이 쪄먹을 거라면 대충 헹구겠지만, 자작하게 끓여 먹을 작정이니 물에 담길 녀석들은 스윙칩처럼 울퉁불퉁한 겉껍질을 정성스레 닦아줘야 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짠기를 빼고 껍질 닦는 데에 30분 걸린다면 막상 조개탕을 끓이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버터에 페페론치노, 마늘까지 넣고 신나게 끓이면 밖에 나가서 먹는 것보다 2배는 많은 조갯살을 즐기며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아이가 어려서 그동안 조개를 준 적이 없는데 다음 달이면 3돌이니 이제 처음으로 삶은 가리비를 두어 개 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신 택배 조회를 했다. 어서 와 조개들아.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아 국물 요리 먹을 날 한번 기가 막히게 잡았군, 하고 스스로 칭찬하며 오전 내내 부산스럽게 청소도 하고 베란다 정리도 했다. 빨래를 돌리자니 비가 와서 꺼려지고...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의 더러워진 운동화. 바로 저거다. 흰 운동화인데 때가 묻으니 영 심하게 꼬질해 보였는데 잘 걸렸군 하고 챡챡 세제를 발라 30여분 동안 둔 후, 솔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품 지옥이 시작되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누구의 신발도 손으로 세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구두를 즐겨 신어 세탁이란 걸 하지 않았고 결혼하고 나서 부부의 신발은 전부 맡겨서 빨았다. 그러나 아이 신발은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 너무 자주 더러워지고, 왠지 세탁 맡기기엔 너무나 옹졸한 사이즈라 본전 생각이 나는 것. 아무런 감도 없이 바른 세제 양이 너무 많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고 빡 빡 하는 처량한 소리를 내며 거품이 빠질 때까지 신발을 문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거품은 이렇게 작은 신발에서 어떻게 계속 나올 수 있는 걸까, 어깨가 없어지는 거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 때쯤 겨우 잦아들었고 혹시 이거 비 올 때 신고 나가면 애 발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2초가량 했지만 그런 상상은 접어두기로 했다.
신발을 빠는 행위는 아이를 낳고 수유를 한 것 다음으로 내가 돌봄의 최일선에 서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실감한 일이었다. 손에 더러운 것을 묻혀가며 힘을 쓰는 일. 집안일도 육아도 모두 노력 대비 태가 나지 않는 일이다. 잘해봤자 안 보이고 안 하면 그제야 탈이 나는 일. 어린 날 하루가 그렇게 길었던 이유는 아직 세상의 모든 자극이 너무 새로워서 그런 것이 가장 크겠지만, 워킹맘 4년 차인 지금 보면 일을 안 해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다. 먹고 자고 싸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 나의 경우 전적으로 우리 엄마의 - 노동으로 편안하게 이루어졌으며 아마도 그 시절 내내 내 운동화도 엄마의 어깨를 희생해서 반짝반짝했겠지.
하얗게 변한 운동화를 걸어두고 아이가 오면 빨랫대로 데려가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처럼 결혼할 때까지 일상의 모든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인간으로는 키우지 말아야지. 엄마가 우리 아기 신발 이렇게 예쁘게 빨았어, 잘했지? 하고 물어보면 아마도, 그 신발이 더러웠었는지도 몰랐을 거면서 고맙쯥니다, 하고 대답하겠지. 그럼 나는 잘 대답했다고 엉덩이를 토닥여줄 것이다.
아이가 올 시간이 다가오자 택배기사님이 올 시간도 다가온다. 아... 나 오늘치 노동력을 모두 소진한 것 같은데. 조개들 이거 닦을 수 있을까. 쉬는 날인데 대체 뭐 하러 이렇게 바쁘게 움직인 걸까. 그래도 힘내서 우리의 금요일 술상을 완성해야겠지. 다음번엔 아예 철수세미라도 사서 조개전용으로 써볼까. 까먹기 전에 와인은 차게 넣어둬야겠군 하고, 물이 떨어지는 뽀얀 운동화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