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첫 그림책 작업일지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겨울이고, 파래서 눈사람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사람의 이야기로 쓰고 싶었던 건 나의 무너진 자존감 이야기. 근데 자존감 이야기의 결론을 지금 내릴 수 없다면 나는 대체 눈사람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야/혹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림책학교에서 배운 많은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언제든 답은 손을 움직일 때 나온다는 것. 눈사람 이야기 어떡하나 생각만 하고 있으면 주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뭐든 슥슥 써보기 시작했다. 눈사람의 모든 것. 나는 늘 새로운 어떤 것을 만나면, 한자어 풀이나 사전을 찾아본다. 어디 보자... 눈사람은...
눈을 뭉쳐서 사람 모양으로 만든 것.
눈사람의 사전적 정의를 보는 순간, 귓가에선 익숙한 류승룡 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수원 왕갈비 통닭!" 그래. 그래서 눈사람은 눈이라는 겨 사람이라는 겨? 가만 생각해 보면 눈이니까 봄이 되면 녹고, 사람이니까 눈코입에 팔까지(그러고 보니 다리는 잘 없지, 그래서 한 자리에서 계속 우리를 기다리는 망부석 이미지가 생겼구나) 있는 거겠지.
그런데 눈사람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을까?
그냥 '눈'이었던 자기를 동글동글 뭉쳐서 눈코입팔까지 만들어 붙여서 '눈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정작 저녁이 되면 지들은 다 집에 들어가 버리고 자기는 밖에 오도카니 서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 사람이라며! 그럼 저 녀석은 자기가 '눈'이 아니라 '눈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알려주고 싶지 않을까? 그럼 눈사람이 합리적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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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생각을 주저리 주저리 하다가 <눈사람의 변> 같은 이야기를 하나 만들었다.
눈사람이 '나는 사람이다'를 주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자꾸 눈사람에 빙의(?)해 있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다 떠올라서 그걸 주욱 늘어놓고 계속 이야기를 만들었다. 눈사람이 자기 특성을 담담하게 소개하는 이야기, 또 눈사람이 자기가 녹아서 없어졌다고 너무 속상해하는 아이에게 쓰는 편지까지. 눈사람에 몇 주 빙의했더니만 이야기 3개가 후루룩둑둑 나왔다. 재밌었다. 그 재미있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닿았는지, 감사하게도, 눈사람 이야기로 첫 그림책을 계약을 하게 되었다.
문득, 그림책은 드러나지 않았던 누군가의 사정을 들어보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장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