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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지 못한 물건 하나

by 석은별

비가 내렸다. 주말 오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회색빛 비구름이 갑자기 쏟아졌다. 차로 뛰어가면서
'트렁크에 우산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났다.

뒷좌석을 휘저어도 우산은 없었고, 트렁크를 열자 익숙한 무늬의 양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옅은 베이지 바탕에 작게 새겨진 보랏빛 꽃무늬. 살짝 낡았지만 여전히 단정했다.

나는 양산을 들고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거, H의 양산이잖아.


H는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동료다. 지금은 이 일을 하지 않는다. 말이 잘 통했고, 일할 땐 단단했지만 가끔 엉뚱한 말로 모두를 웃게 만들던 사람.

그 양산은 그녀가 비 오던 날 나를 차로 바래다주다 내 트렁크에 잠깐 넣어두었던 거다.

“다음에 줄게요.” 그랬는데 그 ‘다음’이 벌써 3년 가까이 지나버렸다.

처음엔 꼭 돌려주려 했다. 그게 그녀에게 꽤 의미 있는 물건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사별한 남편이, 결혼 기념 선물로 사준 선물이었단 얘기를 그녀는 가만히 웃으며 했었다.

그날 이후, 그 양산은 내 차 트렁크에 있었다. 캠핑 용품을 한가득 싣던 날, 양산을 보고 잠깐 연락을 했지만, 결국 여러 사정으로 내 차에 남겨졌다. 다른 것들은 옮겨도 괜찮았는데, 양산만큼은 쉽게 손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지만 우리는 조금씩 바빠졌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상에 묻혀 서로 연락이 뜸해졌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사이. 그런 관계도 있는 거니까.

양산을 손에 든 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울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은별아, 웬일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래된 얘기 하나 꺼내도 돼요?”

양산 얘기를 꺼내자 그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아! 맞다! 우리 만나기로 했던날 갑자기 약속 취소 됐었지!”

“그게 아직도 내 트렁크에 있더라고. 오늘 비 와서 찾다가 발견했어요.”

그녀는 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진짜? 아직도 있었어? 하하, 버려도 돼. 소중했으면 내가 갔겠지.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버려도 돼.’ 그 말 안에는 시간이 지우고 간 감정의 무늬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애써 숨기려는 담담함이 나는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졌을까.

나는 ‘그걸 잘 보관해왔다’는 스스로가 약간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했다.그녀에게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버리지 않았던 건 분명하지만, 그 감정을 대신 간직하겠다는 이상한 책임감 같은 걸 내가 왜 지고 있었을까.

우리는 곧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전화를 끊고, 양산을 다시 펼쳐봤다.

손잡이는 여전히 단정했고, 살이 튼튼하게 뻗어 있었다. 하지만 천은 바래 있었고, 끝단에는 묵은 얼룩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넣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트렁크에 넣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제 그 물건 없이도 괜찮을 만큼 시간을 건너온 것 같았다.

문득 나는 어떤 물건을, 어떤 감정을 혼자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양산을 베란다에 펼쳐두었다. 하루쯤 햇빛을 쐬고 나면 조금은 더 가볍게 보내줄 수 있을까 싶어서.

햇살에 바랜 꽃무늬가 마치 오래된 기억 같았다.

누군가의 시간이 담긴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그 사람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시간 중 내가 지닌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는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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