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고장 났다.

그리고 나의 여름도 조금씩 흔들린ek

by 석은별

아직 6월이지만, 한여름 같은 열기가 벌써 느껴진다. 창문을 열어도 공기는 그저 미지근할 뿐이고, 선풍기의 바람은 어쩐지 더 뜨겁게 느껴진다.

결국 에어컨을 틀었다. 그런데 웬걸 찬 바람은커녕 ‘실외기와 연결을 확인해주세요’라는 문구만 남는다.


고객센터에 어렵사리 전화를 걸었다. 요즘은 상담원 연결보다 보이는 ARS가 더 겁이 난다. ‘0번 누르면 바로 상담원 연결’이라는 단순함이 그리운 요즘이다.


상담원 지시에 따라 자가 점검을 마친 뒤 기사님이 방문하셨다. 기판을 교체했지만, 다시 전원을 넣자 차단기가 내려간다. 기사님을 다시 불러 점검했다.


“실외기 모터가 탔네요.”


모터는 구하기도 어렵고, 본체보다 더 비싸단다. 운이 좋으면 중고 실외기를 구해 다시 설치할 수 있다지만, 그 운이 지금 당장 실현될 확률은 낮다고 한다.


결국 검색창에 입력했다.


“에어컨 1등급 가격.”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10년 전, 이 에어컨을 샀을 땐 200만 원도 안 되는 1등급이었는데 지금은 3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2년 후 시스템 에어컨이 딸린 신축으로 이사 갈 예정인데...”


2년 쓰자고 이 고가의 가전을 사는 게 맞는 걸까?

전기요금 계산보다 더 어려운 건 ‘지금 더위를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300만 원짜리 여름을 사야 하는가’라는 결정이었다.


차라리 2~3등급 제품을 살까. 그렇다고 싼것도 아니다. 더운 날 맘껏 못 틀고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계산기가 손에 있어도,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중고 제품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남이 쓰던 전자제품’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단순한 위생 문제가 아니다. 내 몸 가까이에서 작동하는 기계를 들여오는 일, 혹은 누군가의 남은 계절을 가져다 쓰는 일처럼 느껴졌다.나는 역시, 생각이 많다. 그래서 더 오래 망설이게 된다.


며칠째 결정을 못 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연결이 떠올랐다. 요즘 명상이 깊어지면, 꼭 무언가가 고장난다.

며칠 전엔 교통사고, 작년엔 세탁기, 그 전엔 오븐, 엊그제는 샤워기를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났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일까? 아니면 내가 정화될 때마다 주변의 낡은 것들이 스스로 깨져 나가는 걸까?

비과학적이라 믿고 싶지 않다. 나는 이성적이고 싶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맞아떨어진다. 명상이 깊어질수록, 무언가가 부서진다.


그럼에도 억지로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내 삶에선 자주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었으니까.

에어컨 하나 사는 일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비우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채우는 데에는 아직 겁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 한여름.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다.

이 더위를 참고 철학적 사유에 빠질 것인가, 혹은 단번에 시원함을 사고 일상의 리듬을 되찾을 것인가.

나는 오늘도 비교표를 띄운 창을 닫지 못하고 있다. 에어컨 가격표 사이에서, 나의 다음 철학이 땀을 흘리고 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8화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