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님 밑에서 따뜻한 상호작용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화목한 가정에서 서로를 위하며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배웠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내 유년기는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지만, 그것이 좋은 배움의 터전은 되지 못했다. 대신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독립심만 남았다. 양날의 검처럼, 한쪽은 섬세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힘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늘 불안을 자극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아마도 무의식 속에서는 ‘나처럼, 부모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조차 ‘결혼이라는 여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며 의미를 부여하고, 그 룰을 스스로 지키려 했던 것 같다.
결국 내 삶이 만들어낸 프레임은 내가 경험한 것에 갇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더 많이 관찰하고 배울 수 있었다면, 내 프레임 속에도 더 유연하고 건강한 기능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에 점수를 준다면, 중간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나름 괜찮게 살아왔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든다. 나는 단지 내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결핍과는 무관하게,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뒤늦게 사춘기보다 더 격렬한 자아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온 것 같다.
그 질문은 다시 결혼 생활의 유지라는 설정으로 이어진다. 빠져들수록 결혼도 학교처럼 입학과 졸업이 있는 하나의 과정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째 돈 문제는 여전히 무겁게 짓누른다.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는 공부나 일과는 달리, 돈은 늘 예상과 달리 흘러간다. 내가 버는 수입은 버틸 수 있는데, 남편의 수입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기대와 무관하게 끊기거나 부족했고, 올해는 아예 ‘수입 제로’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 깊숙이 불안과 공포가 파고든다.
돌아보면 남편은 돈을 벌어오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고, 그 돈을 어떻게 쓰고 관리할지는 내 몫이었다. 가계가 빠듯해지면 불만과 비난은 언제나 나에게 돌아왔다. 부부라기보다 동업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했다. 이 관계를 꼭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반대로 더 이상 유지하지 않아도 될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시점, 길어야 앞으로 5년 이내에는 이 결혼을 정리해도 좋다는 답에 도달했다. 졸혼이든 이혼이든, 그 자체가 나쁜 결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좋은 이별일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은 끝까지 유지해야만 성공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꼭 그럴까. 다 살아낸 뒤의 이별도, 서로의 몫을 정리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선택도, 때로는 성숙한 결론이 될 수 있다. 한때는 전부였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를 짓누르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관계를 끝맺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아름다운 완성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내, 며느리, 가장의 동반자로서만 살아가고 싶지 않다. 아이들을 성인으로 키워낸 뒤에는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고 싶다. 돈도, 남편도, 타인의 시선도 아닌,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삶.
결혼을 유지하는 것도 선택이지만, 잘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이별’로 완성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가능성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