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마지막 글
엄마를 만나는 곳은 늘 외갓집이었다.
엄마는 아팠기에, 내가 오면 푸짐하게 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을 외할머니가 대신했다. 그렇게 외갓집에서만 엄마를 만나다가, 엄마가 살던 집에 간 것은 엄마의 장례를 치른 이후였다.
내가 도착하기 전 큰 이모가 먼저 다녀가면서 엄마가 키우던 강아지를 데려갔고, 나머지는 모두 버릴 것들이라 했다. 생전의 엄마가 살던 모습을 나는 사후에야 보게 된 것이다.
방 한쪽에는 신줏단지가 모셔져 있었다. 엄마가 믿던 일본 불교에서는 집에 그러한 공간을 두도록 했다.
기도하며 체크한 흔적이 남은 종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것을 보니, 엄마는 부지런히도 기도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울음이 터진 곳은 바로 그 거울 앞이었다.
경대(앉은뱅이 화장대)라고 부르는 곳, 그 위에는 엄마가 쓰던 기초 화장품 몇 개가 있었다. 거울 주변으로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찍은 사진들이 마치 성장 앨범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사진도 네모 모양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나만 입체적으로 오려내어 거울 테두리에 둘러 끼워 놓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빼내자 먼지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나와 함께 살았던 경험도, 한 방에서 식구처럼 지내본 경험도 드물다.
그렇게 일찍 자식을 낳고 이혼했으니 주변에서는 새로 시집가라고 성화였다고 한다. 만나는 남자가 있어도 쉽게 결혼하지 못한 이유는 늘 나 때문이라고 했다. 어려서는 그 부분이 참 이해가 안 되고 화만 났는데, 이제 와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보니 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에게 의리를 지킨 셈이다.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동안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컸다.
'조금 더 버팀목이 되어주었더라면,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늘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아이들이 클수록 마주한 마음이 있다.
이렇게 눈앞에서 함께 생활해도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고 아련한데, 매번 볼 때마다 쑥쑥 자라 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얼마나 낯설면서도 아쉬웠을까. 그러니 만날 때마다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의 내 모습만 들여다보며 일상을 버텼구나. 다음번에 만나면 또 자라 있을 나를 상상하며 버텼구나.
아침에 나가서 밤에 잠드는 아이의 얼굴을 봐도 낮 시간에 뭘 했는지 궁금한데, 몇 달 만에 보는 나에게 얼마나 궁금한 것이 많고 묻고 싶은 게 많았을지... 그래서 물어온 질문에 귀찮아하고 취조당한다고 느꼈던 그때의 내 마음이 참 궁색하고 부끄럽구나 싶다.
그렇다고 다시 그 시절을 겪는다고 해서 엄마에게 살갑게 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여전히 내 멋대로 툴툴대면서 귀찮아할 테지.
어느 드라마에서 본 대사가 잊히지 않아서 며칠 동안 마음이 울렁거렸던 적이 있다.
바로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라는 말이다.
그 말을 전달하기까지, 서로 외면하며 오해가 깊어져야 했던 그 순간들은 서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만약 그 고통을 피해 함께 살았다면, 우리는 오히려 본질을 잊은 관계 속에서 더 고통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서 엄마와 나는 육신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늘 연결된 삶의 형태로 인연이 닿았다.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전생에 못다 이룬 사랑으로 헤어진 연인이 부모 자식으로 만나 '혈연'이라는 인연으로 서로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길 바라지만, 혹여나 엄마와 내가 또 다른 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못다 채운 경험을 마음껏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내 딸을 통해 엄마와 나의 못다 채운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딸이 내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났으니, 만약 그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 맞겠구나.
앞의 스물아홉 가지 이야기를 통해 내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충분히 펼쳐졌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엄마가 나를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고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채운다. 이것이 나의 망상이든, 합리화든, 나에게는 완벽한 치유의 이야기가 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