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퀴어 여행기 03
야경을 보기 위해 케리 파크에 도착한 건 저녁 여덟 시 사십 분.
서쪽 하늘은 다가올 일몰을 예고하며 연분홍빛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근처 학교에서 단체 파티라도 했는지 슈트와 드레스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떼로 몰려다니며 인증샷을 남기는 중이었다. 케리 파크는 모두가 입을 모아 시애틀 야경 관람의 일 순위로 추천하는 곳이었다. 비행접시 모양의 전망대 위에 뾰족한 바늘이 솟아 있는 스페이스 니들 타워와 근처 마천루가 어우러진 경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애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스페이스 니들이지만, 어쩐지 내겐 관광지라기보다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의 기억이 더 진하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다룬 작품으로는 보통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만추>가 꼽히는데 나는 <그레이 아나토미>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과하게 장수한 탓인지 막장 로맨스의 대명사 신세가 됐지만 나는 이 드라마의 초반 시즌을 무척 좋아했다. 매 에피소드마다 의사들의 이야기를 환자들의 사연과 절묘하게 직조해 내는 각본에 감탄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 무대인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은 사실 LA에 지은 세트라고 한다. 그래도 드라마는 배경이 시애틀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이 틈만 나면 스페이스 니들의 컷을 욱여넣었다. 야간 조명으로 환하게 빛나는 타워가 등장할 때마다 내 마음은 시애틀의 밤공기 속을 떠다녔다.
내일을 기약하며 물러나는 늦저녁의 햇빛이 멀리 건물 유리창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오늘의 일몰 예보는 밤 아홉 시 일 분. 조금 기다려서라도 야경을 꼭 보고 갈 생각이었다. 어느덧 해가 머리를 감추고 나니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일몰 시각이 지났는데도 사위는 좀처럼 어두워질 기미 없이 환했다. 해넘이로부터 삼십 분이 지나도록 기대했던 야경은 나타나지 않았고, 반소매 옷이 미처 덮지 못한 팔에 찬 바람이 스치면서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드라마 속 장면처럼 어두워지려면 멀었겠구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결국 현실이 드라마 같을 순 없을 테니까.
스무 살의 가을은 굶주린 사람처럼 드라마를 포식하던 시절이었다. 성년의 대학생으로서 그토록 그리던 서울로 올라왔다는 봄날의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 같은 얼굴과 지지고 볶았던 고등학교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스스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무리하게 거리를 좁히다가 친구와 멀어지고 호의를 당연히 여기다가 선배가 떠나갔다. 인간관계에서 연이어 실패를 반복하면서 나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 무렵 싸이월드 다이어리에는 정현종 시인의 유명한 시를 비틀어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기 싫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 섬에 가기 싫은 게 아니라 갈 수 없다는 것을. 주변 친구들은 언제나 밝게 웃고 떠들며 어느 무리 속에서든 둥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나는 어쩐지 참 모나게 각진 사람이었다. 원인이야 여럿 있었겠지만 - 가정환경의 문제든 벽장의 문제든 - 나는 군중 가운데 홀로 초라한 내 모습을 비추며 당치도 않은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러다 유독 심기가 예민해지면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을 뱉어버리는 걸 목격했다. 반복되는 후회와 자책. 이미 늦었지만. 그때 나는 누구의 섬에도 환영받을 자격이 없었다.
대학은 마음만 먹으면 ‘아싸’가 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혼자 수업을 듣고 혼자 밥 먹기를 택했다. 사람들이 모여 밝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에서는 차마 같이 어울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육 평 방의 모든 조명을 끄고 커튼을 친 채 암흑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었다.
오직 노트북에서 쏟아지는 십사 인치짜리 직사각형 화면만이 세상과의 간접적인 창구가 되어 주었다. 새벽이 깊을 때까지 나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의 인간관계는 현실 버전보다 몇 배는 더 어지러웠다. 우연히 하룻밤을 같이 보낸 직장상사와 사랑에 빠졌는데 갑자기 부인이 나타나는 세상이었으니까. 메러디스는 부인을 두고 고민하는 닥터 셰퍼드에게 당돌하게 선포했다. Pick me. Choose me. Love me. 정말 용감한 사람이다, 혼자 중얼거렸다. 드라마는 바깥과의 단절을 결심했던 시절에 극중 인물들의 입을 빌려 적잖은 위로를 전해 주었다.
터벅터벅 옆길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커다란 달이 떴다고 흥분하여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었다. 백열광을 품은 달이 빌딩 사이에서 고개를 반쯤 쏙 내밀고 있었다. 툭하면 인생 최고의 어쩌고를 입버릇으로 달고 사는 미국인들처럼 과장하고 싶진 않았는데, 오늘의 달은 절반만 한 크기로도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밝은 빛을 자랑했다. 추위도 잊은 채 홀린 듯이 넋을 놓고 달을 바라보았다.
빌딩 왼편에서 새침하게 등장한 달은 뒤쪽으로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막차 버스 시간을 체크하다가 이젠 일어나야지 싶어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미련이 남아 다시 돌아봤을 때, 얄궂게도 달이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오른편에서 다시 얼굴을 비추는 것을 보고 말았다. 건물 그림자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하늘 위에 둥실 떠오르려는 기세였다. 나는 문득 오롯한 보름달의 모습을 보며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분명 얼마 전에 읽은 소설이 떠올라서였겠지.
김병운 작가의 단편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는 퀴어 소설가가 커밍아웃을 소재로 한 첫 장편을 출간하면서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소설 속 ‘나’는 충동적으로 엄마에게 자기가 쓴 책을 내밀지만, 무슨 내용인지 묻는 엄마의 질문에 막상 말문이 막혀버린다. 어렵다며 얼버무리려는 ‘나’에게 엄마는 이유를 되묻는다.
모르겠어. 밝은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가.
왜 밝은 게 아닌데?
글쎄, 내가 밝은 사람이 아닌가 봐.
얼마 후 추석날 밤 우연히 ‘나’와 엄마는 보름달을 보며 함께 소원을 빌게 된다. 일부러 의식하듯 큰소리로 엄마가 건강하길 비는 ‘나’의 옆에서 엄마도 소원을 말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우리 아들 하는 일 다 잘되게 해 주세요. 밝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 문장의 일곱 단어가 가슴을 세게 두들기는 바람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야 했다. 어째서일까, 엄마가 비는 소원인데 동시에 ‘나’와 나의 소원처럼 들렸다. 밝은 사람. 아마도 내가 평생 가닿지 못할 어떤 이상(理想)의 존재. 달빛 한 줄기 들지 않도록 어둠의 이불을 덮고 있는 동안 역설적으로 나는 밝은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구김살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한순간에 성격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각본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삶은 드라마보다 훨씬 지난한 법이었다. 몇 달 간의 셀프 감금 끝에 결국 나는 쓸쓸했고 Pick, Choose, Love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사람들 사이의 섬에 가기 위한 각본은 내가 직접 쓰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어둠 밖으로 나섰다. 내면이 구겨졌더라도 모두에게 있는 그대로 전시할 필요는 없다고, 어떻게든 날카로이 모난 구석을 둥글게 깎아내려고 애썼다. 밝은 사람이 될 순 없어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잊지 않아야 했다. 단숨에 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조금씩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 믿으며. 보름달을 꿈꾸는 조각가의 마음으로.
제법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오늘 밤 주인공의 찬란한 데뷔 무대가 열렸다. 가림막이 걷힌 검은 연단 위로 한 조각 이지러짐 없는 둥근 달이 힘차게 올라섰다.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스페이스 니들 타워 곁을 장식하는 장면만큼은 <그레이 아나토미>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육 평짜리 어둠을 걷어 젖히고 나와서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볼 가치가 있는 순간이었다. 삶의 무대가 마침내 드라마를 넘어선 밤의 언덕에서 나는 손을 꼭 모아 소원을 빌었다. 부질없다 한들 빌 수밖에 없는 소원을 다시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