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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Jan 02. 2022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주옥되는 순간이 있다

새해 덕담 만들기

40년 만의 추위가 귓불을 땡땡 얼게 만드는 기록적인 새해다. '반반 무마니' 만큼이나 익숙한 '새해 복 마니' 를 카톡으로 외치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맞이한 새해가 좀 더 근사하게 느껴지도록 표현할 말이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복'은 너무 추상적이고 식상하다. 늘 복을 바랬지만, 생각해 보면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게 가장 큰 복이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닫곤 한다.  9살 설날에 용돈을 담아 놓았던 복주머니는 연휴 당일 언니들과 놀러갔던 오락실에서 통째로 털렸고, 그 해 나는 복을 어이없이 간수 못한 어린이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1년을 보냈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복은 무슨 복이야. 그냥 건강만 했으면 좋겠어. 35살까지 우리 몸은 무료 구독이고 36살 부터는 유료로 구독해야 한대' 와 같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으니 복의 무용함을 더 설파하지 않아도 되겠다. 고로, 나도 더이상 '복 많이 받으라' 는 말은 하지 않을 테야!

그렇다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곰곰이 고민해보다 지난 여름의 일이 생각났다. 단순히 복을 빌기 보다 작년 한 해의 회한을 위로하는 방식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지난 여름 이른 새벽이었다. 고막에 내리꼽는 듯한 '구구구구..' 소리에 잠이 깼다.  소리의 진원지는 에어컨 실외기용 베란다 구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폭염이 시작되기 직전 딱 요맘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비둘기가 내 에어컨 밑에 또 집을 지었다. 지난 해 맘이 약해져 내 베란다를 내어주고 한 번 여름을 나게 도와준 게 화근이었다. '안전한 둥지'로 내 베란다를 점찍은 비둘기는 어김없이 찾아와 알을 3개나 낳아 놓고 그늘에서 시원하게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황당해서 둥지를 지켜보자 알을 품던 어미비둘기는 고개를 180도 돌리며 괴이하게 새빨간 눈동자를 나와 마주쳤다. 비둘기엄마의 광기어린 눈은 내게 텔레파시로 '언니 고마워.....집 양보해줘서....'라고 외치는 듯했다. '히익!' 난 어쩔 수 없이 창문을 탕탕 때려 비둘기를 쫓아내고 40도를 웃도는 기록적인 폭염에 땀을 뻘뻘 흘리며 베란다 물청소를 시작했다. 비둘기가 낳은 알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조리 싹 치웠다. 내 입장도 무지 난처했다. 녀석들이 내 베란다 실외기에 똥을 잔뜩 싸놓고 나뭇가지로 집을 짓는 바람에 에어컨의 냉매 가스관이 부식되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무려 산 지 1년 밖에 안 된 2020년형 에어컨이었다. (산 지 1년이 됐다는 건 지지난 여름에 딱 한 번 사용했단 뜻이다.)

알이 구석에 하나 더 있었다 /사진_나 (2021)

닦아도 쉽게 가시지 않는 끔찍한 악취를 내뿜는 비둘기 잔해들을 치우며 다시는 비둘기에게 단 0.1평의 자리도 내어주지 않으리라 굳세게 다짐했다.  '어쩌다 이런 지저분하고 불행한 일은 나를 그냥 건너 뛰지 않지?' 하는 생각이 스치며 2021년 한 해의 운을 모조리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 해 기록적 폭염에 에어컨 고장난 사람, 코로나로 밖에 나가기도 힘든데 집은 푹푹 찌고, 온집안에 냄새가 진동을 하고 글은 잘 안 써지고 몸도 아팠고, 불면증으로 잠도 못 잤고, 갑자기 들이닥친 일거리에 하려던 계획이 다 꼬인 사람이 바로 2021년 여름의 나였다. 써야 할 글은 산더민데 폭염에 남의 똥 청소까지 해야하다니. 빗자루를 들고 물청소를 하다, 눌어붙은 비둘기 변을 떼어내는 게 너무 힘들어 엉엉 울고 싶었는데 눈물로 흘릴 수분이 다 땀으로 흥건하게 빠졌는지 눈물은 안 나왔다. 눈물이 안 나는것도 괜히 억울했다.


 어쨌건 불운은 부지런히 쓸고 닦고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불'자를 지울 수 있기 마련이니 당장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비둘기 퇴치' 라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그리고 비둘기 퇴치에 좋다는 모든 제품을 검색해 밤새 상품평을 비교한 뒤 '2021년형 비둘기 퇴치 스파이크' 라는 제품을 구매했다. 네모난 판에 뾰족한 플라스틱 침이 듬성하게 나 있어 베란다 바닥에 설치해 비둘기가 앉지 않도록 하는 제품이었다. 평점이 무려 별 4개 반이었다. 택배가 오기까지 밤새 뜬 눈으로 지키며 비둘기 소리만 들리면 쫓아내길 반복하며 삼일을 기다렸고 택배는 도착했다. 나는 즉시 베란다에 제품을 설치했고 더이상 비둘기는 오지 않았다. 대만족이었다. 이구역 리뷰왕인 나는 당장 상품평을 입력하기 위해 제품 구매 페이지로 다시 들어갔다. 그때 내 두 눈을 사로잡은 리뷰 수 '7900'개. 평소같으면 그냥 넘겼을 숫자이건만 그 순간 내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 주옥같은 일을 나만 겪은 게 아니고 7900명이나 더 겪었다는 말이지?'

남의 불행을 내 행복의 지표로 삼지 말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의 감정을 부인할 순 없겠다. 7900개의 리뷰 수를 보는 순간 그들의 괴로움이 얼마나 내게 위로를 주었는지... 7900명의 사람들은 이 제품을 통해 깊은 고통에서 벗어났고 제품을 사용한 뒤 얼마나 삶이 나아졌는지 간증과 함께 사진을 올려두었다. '오 홀리 피죤!' 우리는 비둘기로 고통을 나눈 랜선 너머의 동지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이의 막연한 '힘 내' 보다, 아파본 사람이 건네는 '괜찮아 질거야' 가 더한 힘이 되는 기적이었다. 알 수 없는 용기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든 비둘기 스파이크처럼 나는 해답을 찾아낼 것이고,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수많은 고통도 불행도 나 말고 누군가는 또 괴로워하고 있을테니 누군진 몰라도 막연한 동지애로 이겨내보자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더니, 어떤 방법으로든 평화를 주긴 줬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들에게 건넬 새해의 인사의 요점은 이거다. '지난 세월 당신을 괴롭혔던 주옥같던 일들은 비단 당신만 겪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 주기를. 매시간 매 분 매 초 조금만 참고 견뎌낸다면 우리는 결국 진짜 주옥(珠玉)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압축해 이렇게 인사할 것이다.

"2022년, 당신만의 빛나고 귀한 주옥(珠玉)을 빚는 한 해를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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