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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Oct 09. 2021

형제가 몇 이에요?

이게 그렇게 아픈 질문일 줄은.


"형제가 몇이야?"

어릴 땐, 이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좋았다.

그럼 난 대답한다.

“언니가 넷, 내가 다섯째."

"히익! 다섯 째? 다 딸?"


이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상대방의 당황과 경악은,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늘 재밌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많고 지식과 상식의 지경이 훨씬 더 넓은 큰언니가 있다는 것도 우쭐했으며

'네가 그래서 아는 것도 많고 성숙했구나~' 라는 칭찬을 듣는 것도 꽤나 좋았다.

내 지인의 형제자매와 견주었을 때 쪽수로 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쓸데 없지만 든든한 자산이고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대답 하나에 어쩜 그리 많은 부수적인 질문이 꼬리를 물게 되던지.


"왜 그렇게 많이 낳으셨대?"

"아들 낳으려고?"

"아빠가 장남이셨나?"
"부모님이 금슬이 좋으셨네~"

또는 이런 탄식의 한마디도 있다.

"저런, 마지막에 성공은 못 하셨네!"


아들을 낳기 위해 줄줄이 자식을 낳던 시절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따라 붙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딸은 살림밑천이자 노동력이 아니었던가. 다행인 건, 나는 딸로 태어났음에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은 날 실패자라고 생각하는구나? 아닌데. 나 아들보다 괜찮은 딸인데.’


다양한 사람들의 입에서 예고없이 터져 나오는 무례에도 타격을 입지 않은 나지만, 마지막에 '저런, 마지막에 성공을 못 하셨네' 라는 말은 끝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묘수를 생각해 냈다. 말실수하신 분께 탈룰라 전법으로 응수하는 것.


"제가 딸이라 아빠가 사고 수를 면했대요. 내가 아들이었으면 진작 돌아가셨을 거라나.아빠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었거든요. 엄마가 저 임신하고 만삭때.”


그러면 열의 아홉은 ‘저런…괜한 질문을 했군’ 하며 더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진짜였다. 큰 교통사고를 당한 아빤 급히 응급실에 실려갔으나 모든 의사분들이 수술중이라 응급수술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다. 다른병원으로 환자 이전을 하기에 아빠의 상태는 너무 위독했다. 그러던 그 때, 마치 드라마처럼 그 병원에 매우 실력있는 흉부외과 교수님이 세미나 차 와 계셨고, 아빤 그분의 도움으로 수술실 순번을 제일 앞으로 바꾸면서까지 기나긴 수술을 받고 살아나셨다. 이 기적같은 일을 두고 오래 알고 지낸 한 스님은 엄마 뱃속에 있던 내가 ‘딸이라서’ 덕을 봤다는 아리송한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생과 사의 문턱에서 고민하던 아빠의 영이 ‘이승의 한을 다 풀었다’고 생각하며 주저없이 하늘로 가는 것을 택했을 것이라는 거였다.  ‘전설의 고향’의 소재같은 묘한 사주풀이라고 생각했지만 스님의 말씀이 있고나서야,  난 뒤늦게나마 할머니에게 내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아빠의 목숨을 구하고 태어난 복덩이! 장하다!

(물론 모든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지만. )


그러나 1987년 그날, 산부인과 풍경의 분위기는 복덩이가 태어난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엄마가 나를 낳으시던 날, 아빠는 또 딸이면 어쩌나 싶어 셔츠가 젖을 정도로 땀을 뚝뚝 흘리며 병원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얼뜨기 같던지, 진통하던 엄마는 아빠를 한 대 크게 쥐어박고(엄마표현으로 -한대 내지르고) 싶다고 했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다 살아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진통 속에 분만이 끝났고 할머니는 성별부터 물어보셨다. ‘또 딸’이라는 말에 뒷목을 잡고

놀라 뒤로 넘어가신 할머니에 가족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막 죽을 고비를 넘긴 산모보다 할머니의 안위를 걱정하는 촌극이 벌어졌고 37-8도가 넘는 폭염의 분만실에서 탈진 직전이 된 노산의 산모도, 처음 세상 공기를 마시며 힘차게 울었을 갓 태어난 아기도 환영받지 못한 8월이었다.

그 시공간의 일들은 당사자였던 나조차 기억할 수 없는 영역의 기억들이다. 그저 태어나 보니 언니가 넷인 아이였기에 어렴풋하게나마 엄마의 고통을 짐작할 뿐인 것이다.


언니들과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할머니 할아버지 밥도 챙겨드리고 주말이면 개그 프로를 보며 '오데로 갔나 오데로 갔나 오데가~' MBC합창단의 개그합창을 따라 불렀다. 5명이니 소프라노-메조-알토의 여성3중창 역할을 나눌 수가 있어서 재미 있었다. 전래동화책을 테이프에 녹음할 때도, 10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도 1인 2역씩 커버가 가능했다.자매들의 생활이 얼마나 재밌는지 난 매일 주변에 자랑했고 친구들은 늘 부러워했던 유년시절이었다.

나는 비록 '아들의 실패자'로 태어났지만, 앞선 세계에 살고 있던 네 언니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 다섯은 서로의 중재자이자 패션 조언자,  때론 근본 없는 개그 배틀로 감 떨어진 일상의 활력제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완전체로 성장했다.무적의 오자매로! 난 우리 다섯을 낳은 것을 부모님도 당연히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근자감은 말 그대로 근거없는 자신감일 뿐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낳은 걸 창피해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엄마 아빠와 스페인 여행을 갔던 재작년이었다.

우리 셋은 딱 봐도 70대 노부부와 함께 여행 온 30대 초반 늦둥이 딸의 모습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뭔가를 물을 태세의 패키지 일행들 눈치에,  곧 호구조사가 들어올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아슬아슬하게 눈을 피하며 우리만의 패키지여행을 조용히 진행하던 여행 6일차 쯤, 같은 패키지 여행객들과 동그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되어서야 사건은 벌어졌자. 일행 중 홀로 온 40대 중반의 여자분이 대표격으로 기어코 내게 우리의 관계를 묻기 시작한 거였다.


"늦둥이에요?외동?"

"다른 형제는 왜 안오고?"

"다른 형제는 다 결혼하시고?"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엄마에게로 쏠렸다.

질문을 애써 못 들은 척 하는 걸까. 엄마의 예민함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는 엄마 때문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걸 못 견디는 나는 또 나대기 시작했다.

"저희는 다섯자매고요, 언니들은 다 결혼했고, 싱글인 제가 총대 매고 엄마 아빠 모시고 여행 온 거고요..."

그 순간 열 두어명 되던 일행들의 표정이 조금 더 적극적인 궁금함으로 활짝 열렸다.

40대 중반의 여성은 지체않고 물었다.

"아~ 그럼 아들 낳으시려고? 다섯을 낳으신 거야? 아휴, 힘드셨겠어....아주 시댁에서 들들 볶으셨나 보다!"


아...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난 참으로 못난 딸이었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지금껏 엄마가 우리 자매가 다섯이라는 얘기를 해야할 때 늘 부끄러운 듯한 무드를 취하는지 항상 이해하지 못했는데....아무렇지 않은 척 쓴웃음을 짓는 엄마의 표정을 보니 내가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묵묵히 식사를 하시던 아빠는 테이블에 숟가락을 탕! 소리나게 놓았다.

"해야할 질문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거요! 당신 실수 크게 한 거야!"

아빤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나 나가 서둘러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엄마는 애써 그 상황을 못 본 척, 방금 나간 사람이 우리의 일행이 아닌 척, 모르는 사람인 척 그저 얼굴이 빨개진 채 묵묵히 억지로 빠에야를 꾸역꾸역 씹어 삼키고만 있었다.


남의집 귀한 딸에게 아들 낳으라고 들들 볶은 시어머니를 둔 아들의 상처, 그런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못난 남편의 상처, 여자로 태어나 아들 낳는 기계로 전락했던 잔인한 과거 속 엄마의 상처, 다섯의 꼬물거리는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지도 못하고 키워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별만 보고 출퇴근했던 엄마와 아빠의 지난 40년.

그리고 다섯 째로 태어나 닉네임이 '실패작'이 되어버린 나의 상처....

그 여성분의 마지막 말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집약된 과거의 흔적들이었다.


그 40대 중반의 여성분은 아빠께 와서 실언이었다고 사과를 하고 갔지만 그동안,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해드리지 못했던 내 마음이 아직도 무겁게 남았다.

'형제가 몇이나 되세요?' 나도 주변인에게 종종 하게 되는 흔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위로 언니 하나 있어요.'


어떤 엄마는 아들 하나만으로 안 먹어도 배부르고 남편보다 든든하다고들 하던데 나는 그런 자식이 될 수 있을까.

한참 멀은 건 분명하다. 일흔을 넘기신 엄마는여전히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노심초사 잠을 설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딸 가진 엄마는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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