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장 좋은 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곳을 지나갈 것이다
잠에서 깼는데, 무언가가 방 안을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뭐지?' 누운 채로 실눈만 뜨고 관찰을 시작한다. 오랫동안 공들여 바라보니, 알 것 같다. 깃털보다 가벼워진 내 마음이다. 마음이 풍선처럼 날아오르고 있다. 미래를 결정한 여행자의 아침은 확실히 다르다. 홀가분하다.
모든 게 선명한 아침. 한껏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데. 별안간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풍선들이, 하나, 둘, 쪼그라들면서 방구석에 우수수 처박힌다.
착각이었다. 선명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깨닫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전히 자리에 누운 채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그림을 그려본다. 아무래도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듯싶다.
마음만으로 비행기를 탈 수도 없고, 생각만으로 열차를 탈 수도 없었다. 비행기 표 예약, 열차표 예약, 숙박 예약. 온통 예약할 것 투성이다. 오늘은 온종일 예약만 할 팔자다. 예약 없이 떠나지 못하는 초보 여행자의 비애다.
비행기표를 먼저. 열차표는 그다음. 그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순서다. 하지만 나는 열차표를 먼저 알아보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 캐나다에 가는 거니, 열차표가 없으면 웃기는 짜장이 된다. '비행기표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거야.' 막연하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일단 앞세워본다. 상식을 뒤집어본다. 나도 모르게 슬슬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간밤에 본 영상 속 열차는 캐나다의 비아레일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타야 할 운명의 열차다. 비아레일은 캐나다의 국영 철도였다. 국영 철도라는 말에, 안도감부터 든다. 국영 철도니 당연히 가격도 저렴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덕분이다.
캐나다 비아레일을 색상으로 파악해 보니, 모두 9개 노선이었다. 그중에 동서를 횡단하는 붉은색 캐나디안 노선이, 예약해야 할 노선이었다. 동쪽의 토론토와 서쪽의 밴쿠버를 왕복하는 노선이다. 캐나디안 노선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었다. '너희들의 여정은 토론토와 밴쿠버 안에서 시작되고 끝날 것'이라고.
캐나디안 노선은 중간에 서드베리, 위니피그, 새스커툰, 에드먼턴, 재스퍼를 경유한다. 노선의 길이는 총 4,466km. 이 거리를 달리는 데 약 8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정차에 소요되는 시간을 무시하고 대략 계산해 보면, 시속 55km의 속도로 달리는 셈이다. 캐나다를 동서로 횡단하는데, 3박 4일이 걸린다. 서울-부산행 열차를 몇 번을 타야 하는 거야? 그게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최대 잣대였다. 모든 수치가 공허하고,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이제 좌석과 날짜만 결정하면 됐다.
좌석 등급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프레스티지 클래스(Prestige Class), 슬리퍼 플러스 클래스(Sleeper Plus Class), 이코노미 클래스 (Economy Class).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 대강 짐작은 했지만, 등급에 따라, 가격도, 제공되는 서비스도 달랐다. 비싼 프레스티지 클래스를 탈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어떤 서비스가 제공되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프레스티지는 개인 샤워실, 제약 없는 식사, 넓은 잠자리, 라운지 이용 등 럭셔리한 서비스가 모두 제공되는 좌석이었다. 이 정도 서비스가 제공되면, 가격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3,800가 넘는 가격에 놀라서, 순간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근데, 모든 좌석이 매진이었다. "이런! 이번 여행에 프레스티지 한 번 타볼까 했는데 빈자리가 없네." 아내 앞에서 괜스레 허풍을 한 번 부려 봤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손은 벌써 다음 등급 좌석을 클릭하고 있었다.
슬리퍼 플러스는 샤워와 침대, 식사가 제공되었다. 슬리피 플러스는 제공되는 잠자리에 따라서 다시 세부적으로 8개 요금으로 나뉘어 있었다. 슬슬,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상단 침대 할인, 상단 침대, 하단 침대 할인, 하단 침대, 1인 선실 할인, 1인 선실, 2인 선실 할인, 2인 선실. 일단은 보류.
이코노미 클래스는 샤워, 침대, 식사가 아예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면, 잠은 어디서 자지? 앉아 가는 좌석이 곧 잠자리였다. '비행기 비즈니스석과 다를 바 없는 좌석입니다', '테이블 트레이가 있는 편안한 안락의자입니다'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에 대해서 비아레일 홈페이지에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다. 사진 속, 이코노미 좌석에서 숙면에 빠진 두 여성의 표정도 무척 편안해 보였다.
잠자리는 그렇다 치고, 밥은 어떻게 하지? 열차 안 식당에서 사 먹어도 되고, 스낵바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미리 음식을 준비해서 탑승하는 것도 가능했다.
비아레일 열차에는 특이하게도 스카이라인이라는 복층 구조로 된 칸이 있었다. 이 칸 상부에는 파노라마 돔이 있어서 360도로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간밤에 본 영상에 등장하는 열차 칸이 바로 파노라마 돔이었다.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더라도 파노라마 돔을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최대 관심사였다. 다행히도 좌석 등급과 상관없이 파노라마 돔은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요금 체계가 많아서 복잡해 보였지만, 결국에는 샤워, 잠자리, 식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샤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침대에서 잘 것인가? 의자에서 잘 것인가?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것인가? 4일 동안 열차를 타야 하니, 쉽게 결정하기는 힘들었다.
한 가지 변수가 있긴 했다. 비아레일 홈페이지에서, 때마침 할인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어떤 좌석은 거의 50%에 가까이 할인 중이어서, 한 사람 가격으로 두 명이 탈 수 있다는 결론도 나왔다. 괜히 없던 욕심이 생겼다.
아내의 의견을 한번 들어 보기로 했다. 친절하고 자세한 나의 설명과 고민까지 다 들은 아내는, 의외로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당연히 가장 저렴한 거 타야지. 그 돈 아껴서, 맛있는 거 사 먹으면 되잖아." 이럴 때 단숨에 결정을 내리는 아내가 존경스럽다. "샤워는 물티슈로 하면 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알뜰살뜰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는다.
마침내 좌석을 결정했다. 결제하기 전에, 마지막 선택이 남았다. 방향과 속도의 문제였다.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갈 건지,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갈 건지 결정해야 했다. 단숨에 갈 건지, 쉬엄쉬엄 갈 건지도 결정해야 했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서 찾았다. 이 열차 여행의 백미가 되는 곳을 우연히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 열차의 하이라이트는 재스퍼에서 밴쿠버 구간이었다. 록키산맥을 지나는 구간이다. 그래서 어떤 여행객들은 이 구간만 타기도 했다. 그런 편법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어쩌면 캐나다 횡단 열차여행을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정은, 절정 자체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정 전의 과정이 꼭 필요한 법이니까. 그게 우리가 지루할지도 모르는 초반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였다. 하이라이트를 만끽하려면, 묵묵히 달리고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극적인 순간이 더욱 극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최종 결론을 내렸다.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달리기로 말이다. 하지만 단숨에 달리지 않기로 했다. 한 템포 쉬어 가기로 했다. 우리만의 방식대로 절정을 준비하기로 했다.
계획은 이랬다. 토론토를 출발해서 일단 재스퍼까지 달린다. 재스퍼에서 내린다. 이 열차는 한번 내리면, 어느 곳이던지 3일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 열차는 3일 뒤에 오기 때문이다. 재스퍼에서 3일을 보내고, 다시 열차에 오른다.
재스퍼에서 밴쿠버까지는 열차로 19시간이 소요되니,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는 가장 좋은 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구간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절정은 더욱 극적일 것이다. 우리의 하이라이트는 아름다울 것이다. 변수만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