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ESQ가 아니고, 아내는 MD가 아니다
캐나다 횡단 열차 티켓을 구입했으니, 다음 상대는 비행기 티켓이다.
날짜도 뚜렷해졌고, 계획도 명확해졌으니,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당장 비행기표 비교검색모드로 변신한다.
싱거운 결론이 쏟아져 나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놀룰루에서 토론토까지의 비행기 노선이 많지 않았다.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 가장 저렴한 노선에 눈길이 오랫동안 머문다. 비행기가 몇 번을 경유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기내식이나 서비스의 품질도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토론토까지 공짜로 갈 수만 있다면, 비행기 날개에 얹혀서라도 갈 마음이었으니까.
탑승일까지는 열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을 남겨 놓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행기 티켓 구입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 한 달 전에는 예약을 마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매우 충동적인 여행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었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선택의 폭도 확연히 좁혀주었다. 몇 번씩 검색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국적기인 델타항공이 최고의 조건을 내민다. 애틀랜타를 경유해서 토론토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돌아올 때는 시애틀을 경유해서 호놀룰루로 온다. (우리가 다시 호놀룰루로 돌아오는 이유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티켓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와이 여행이 시작될 때는, 캐나다에 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단숨에 항공권 예약을 마치고, 무사히 카드결제까지 끝냈다.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이제 숙소만 예약하면 문제는 없다고 여겼다. 평소 같았으면 비행기표 예약을 마치고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불길하다.
결제를 마친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날 무렵. 델타항공 홈페이지에 무심코 접속해 봤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비행기표 예약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카드승인이 아직까지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하다.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는데.'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사를 제치고, 델타항공에 문의했다. 빠른 해결을 하려면, 전화가 최선이었다. 일단 전화부터 걸어야 했다. 동시에, 이 상황을 명쾌하게 영어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고심 끝에 내린 해결책은, 한국말이 통하는 델타항공 한국지사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수신자부담의 14개의 번호를 누르자마자, 반가운 한국어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눈치 빠른 상담원은 이 쪽 상황을 미처 다 듣기도 전에, 발 빠르게 파악을 마쳤다. 상담원의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될 정도로, 빠른 대응책을 내놓는다. 하지만 대답이 전혀 예상 밖이다. "이 예약 건은 결제가 불가능합니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는 줄로만 알았다. "혹시, 카드 문제인가요? 카드 문제라면, 다른 카드번호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여권과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으십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세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권 정보와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으십니다." 이어진 상담원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혼수상태가 되었다.
비행기 예약을 전담했던 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고 난 뒤에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델타항공을 처음 예약하는 사람의 실수라고 섣불리 변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평생 감추고 싶었던 그 이유는, 이렇다. 델타항공은 예약할 때, 호칭을 선택하는 란이 있다. Mr, Mrs, Ms, Mst, Miss, Dr, Rev. 선택할 수 있는 호칭은 모두 7개다. 나는 내가 어떤 호칭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호칭도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학습효과 덕분이다.
신기하게도, 델타항공은 나에게 호칭 하나만을 원하지 않았다. 또 다른 호칭도 원했다. 이건, 지금까지 예약했던 항공사와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었다. 호칭을 선택하고, 탑승객 이름까지 다 적었는데, 추가 호칭을 선택하는 란이 또 나왔다. I, II, III, IV, CLU, CO, CPA, DDS, ESQ, MD, RN, RhD, V, VI. 추가 호칭은 자그마치 14개나 된다. 모두 처음 보는 생소한 호칭들이다. 도대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그 순간, 나는 의심해야만 했다. 차라리 계속 의심하는 것이 나았다. 아니면, 최소한 아내에게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뻔뻔하게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각각의 호칭이 무슨 의미인지 일단 검색부터 했다.
ESQ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1. … 님 (Esquire: Mr가 쓰이기 이전에 특히 업무상의 편지에서 남자 이름 뒤에 쓰던 호칭)
2. (美) (남녀 변호사 이름 뒤에 붙여) … 변호사(님)
검색을 마치고 나서, 나는 ESQ를, 아내는 MD를 선택했다. 나는 분명히... 님이었고, 아내는 마담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MD의 사전적 의미는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ESQ의 사전적 의미를 대충 보고 나서, 내 멋대로 MD는 Madam의 약자로 판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MD가 Doctor of Medicine의 약자, 즉 의학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나는 ESQ가 되었고, 아내는 MD가 되었다. 순식간에, 나는 변호사가 되고, 아내는 의학박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예약을 마쳤다.
여권 정보와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담원 말에 의하면, 추가 호칭이 여권정보와 일치하지 않아서 발권이 중지된 상태였다. "그러면, 여권 정보대로 수정해서 발권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나는 상담원에게 부탁했다. '저희가 이 비행기를 못 타면, 일생에 한 번 탈까 말까 한 열차를 놓치게 됩니다.' 구차한 설명은 미처 할 새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새로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이 예약 건은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정신줄을 붙잡고서, 나는 요구했다. "그러면, 새로 예약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새로 예약을 하시면, 가격이 달라지는데 괜찮으신가요?" "얼마 나요?" "지금 금액보다 30만 원 정도 더 청구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에 번개가 치기 시작한다. 요란한 번개 소리가 온몸을 관통한다. 에어컨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 안에, 고통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상황을 잠시 정리해 보자. 지금 캐나다 비아레일 열차 예약도 끝났고, 토론토 숙박도 예약을 마쳤는데, 비행기표가 확정이 안된 상황이다.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요?" 대답을 강요하는 상담원이 괜스레 야속하기만 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히려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잠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혼수상태가 된 채,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생애에 가장 빠른 동작으로 다시 델타항공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맙소사! 정말로 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내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진다.
"혹시 모르니까, 다른 날짜도 한번 알아봐."
정신을 가다듬고, 날짜를 바꿔본다. 이럴 수가! 다행히도 남아 있는 비행기 표가 있다. 계획했던 것보다 토론토에 하루 늦게 도착하고, 밴쿠버에서 하루 일찍 떠나는 여정이었지만. 더군다나 이 표는 30만 원을 추가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표였다. 추가 지출이 조금 생기긴 했지만,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조바심을 숨기지 못한 상태로, 떨면서 예약을 마쳤다. 당연하게도, 이번에는 추가 호칭을 선택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ESQ가 아니고, 아내는 MD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