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가 하와이에서 겨울옷을 살까?
기분이 좋아진 저녁. 이 순간을 기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호놀룰루에서 보내는 날마다 기념할 것 투성이었지만, 오늘은 격이 달랐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멋진 곳에서 맛있는 것 먹는 게 전부였다. "오늘 잘했지?" "정말 잘 수습했어."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면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게 우리만의 기념식이었다.
알라모아나 공원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깝고 편안해서, 우리가 좋아했던 곳이다. 기념식에 준비된 것이라곤, 인근 쇼핑센터에서 운 좋게 구한 할인 도시락이 전부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상쾌한 바다 바람을 맞으면서 먹는 저녁은 상상만으로도 근사했다.
아내는 먼바다를 보고 있었다. 평화롭고 그윽한 눈빛이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아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캐나다는 지금 얼마나 추울까?" 그녀가 내뱉은 말이 바람소리와 뒤섞여 내게로 왔다. 그 소리는 12개의 분리된 음절이 되어 하나씩 내 귀에 차례대로 도착했다. 캐.나.다.는.지.금.얼.마.나.추.울.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젓가락까지 전율에 휩싸일 정도였다. 완벽한 순간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무딘 나의 계절감각에 아내가 힘차게 따귀를 날리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운 하와이 날씨에 푹 절여져 있던 몸은, 캐나다도 이 곳처럼 더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 호놀룰루에서 토론토로 간다는 것은 여름에서 곧장 겨울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연평균 기온 20도 이상을 유지하는 하와이의 2월의 바다. 그 앞에 앉아서 나는 왜 토론토도 하와이처럼 더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냥 비행기에 몸만 실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을까? 자책이 일순간에 몰려왔다. 열차표, 항공권, 숙소 예약까지 마친 그 날.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날.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 날. 마지막 퍼즐이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토론토에 가서 걸칠 옷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내의 대답이 빨랐다. "그냥 있는 옷 껴입고 가도 되지 않을까?"되지도 않은 반항을 해본다. "미쳤어? 나는 겨울 점퍼라도 있지만, 자기는 바람막이 점퍼랑 후디스, 얇은 청바지가 전부잖아." "그걸로 어떻게든 버텨 보지 뭐." 본전도 못 찾을 호기를 부려본다.
이 모든 게 오래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가져본다. 평소에 아내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고,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다. 덕분에 아내는 겨울 점퍼를 챙겨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두꺼운 아내의 겨울옷이 두고두고 짐이 될 거라고 잔소리를 했다. 보란 듯이 당당한 자태로 얇은 옷만 입은 채 집을 나섰다. 몸에 열이 많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1월의 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의상이었다. 당시에는 일단 비행기만 타면 해결될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고서 정말 괜찮겠어?" 한국을 떠나기 전, 아내의 마지막 조언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내가 겨울 옷을 사러 가자고 아무리 보채도, 어떻게든 버텨볼 요량이었다. 토론토의 추위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지한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만용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유는 제법 논리적이고, 그럴듯했다. "여기는 일 년 내내 더운 하와이야. 여기서 어떻게 겨울옷을 구해? 여기서 누가 겨울옷을 팔고, 누가 겨울옷을 사겠어? 정 필요할 것 같으면, 토론토에 가서 사자."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구할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나 보자." 아내의 그 말에 더 이상 토를 달 이유는 없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하와이에서 겨울옷을 못 구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는 겨울옷을 구하러 다녔다. 하와이 어딘가에 겨울옷을 찾아다닌 최초의 한국인 부부로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주 방문했던 로스 할인점부터 일단 뒤져보기로 했다. 첫 번째 매장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매장에서 아내가 스웨터 한 벌을 찾아냈다. 블랙, 화이트, 그레이. 세 가지 무채색으로 삼등분된 여성용 스웨터였다.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발견한 기분이 이런 걸까?
그 귀한 여성용 스웨터를 들고서 계산대 앞에 선 순간. 매장 직원이 화들짝 놀라면서 아내에게 묻는다. "너 추워?" "아니, 나 캐나다에 갈 거야." "부럽다. 얘."
마치 선문답 같은 대화가 아내와 계산하는 직원 사이에서 오고 간다. 그러고 나서, 적어도 하와이에서 100년 동안은 팔리지 않았을 것 같은 스웨터는 아내의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앞서고, 나는 마지못해 쫓아다니는 모양새였다. 겨울옷을 구하는 것에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이 계획에 시큰둥했던 나도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괜한 승부근성이 발동한 탓이다. "아무리 더운 곳이라고 해도 겨울옷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돼? 이 글로벌한 지구촌에 말이야." 점점 나는 집요해졌다. 겨울옷을 찾는 일에 우리는 이미 집착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집착은 서서히 광기의 색채를 풍기기 시작했다.
월마트, 로스, 알라모아나 쇼핑센터, 백화점, 스포츠용품 전문점 등 상점을 며칠 동안 들쑤시고 다녔다. 아마도, 명품점을 빼고는 하와이에 있는 대부분의 상점을 방문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하와이에 방문하시는 분들은 의류상점 직원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좋다. 그러면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와이에서 겨울옷을 찾던 그 미친 부부 말하는 거야? 옷이 없어서 결국 캐나다에 못 갔다던데." 혹시라도 이런 무용담을 듣게 된다면, 우리 부부를 떠올리시면 된다.
신기했던 것은 돌아다닐수록, 조금씩 소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퍼즐 조각을 하나씩 둘씩 맞춰가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게 하와이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깜짝 이벤트 같은 것 아닐까?" 그런 실없는 농담을 아내에게 건넬까 말까 고민할 즈음. 아내의 겨울옷이 거의 완성되었다. 아내는 신발만 빼면, 당장 남극에라도 갈 채비를 갖췄다. 마지막까지 애를 먹였던 것은 내 겨울옷이었다. 남성용 겨울 점퍼는 보이지 않았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에 방문한 곳은 와이켈레 쇼핑센터였다. 숙박하는 곳에서 버스로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내는 쇼핑센터를 모두 집어삼킬듯한 기세로 돌아다녔다.
한 상점에서 가을점퍼 하나를 발견하고는, 드디어 찾았다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 옷 겨울 점퍼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얇은 것 같은데?" "그거 겨울 점퍼 맞아. 당신은 열 많이 나는 체질이잖아. 당신이 입으면 겨울 점퍼 되는 거지." 내가 제기한 의혹에 아내는 의뭉스럽게 맞섰다. 결정타는 그 가을점퍼가 때마침 세일 중이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할인가 앞에서 나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할인 가격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그 점퍼를 입었다.
"이 겨울 점퍼 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아! 정말 따뜻한데. 토론토 가도 하나도 안 춥겠어."
그 순간, 우리는 하와이에서 겨울 점퍼를 입고서 미친 듯이 좋아하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 신중하게 여름 신상 옷들을 고르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훔쳐보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토론토의 겨울이 무섭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