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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Mar 24. 2017

셀프체크인 초보자의 깨달음

그림자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다

호놀룰루 공항에는 셀프체크인 기기가 있다. 무인발권기다. 별 것 아닌 이 기기가 나에게 호기심을 자극한 건, 한 블로그 때문이었다. 토론토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이었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무인발권기를 이용하는 경험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몇 차례의 스크롤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무인발권은 쉽고 간편하다. 나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무인발권도 척척 잘하는 남편이 되고 싶었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아내는 그런 나의 모습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일본 여행에서 기차표 무인발권도 해보았는데. 걱정할 필요 없겠지. 나름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호놀룰루 공항에 들어섰다. 비어있는 셀프체크인 기기가 많았다. 멀리서 보더라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기기였다. 예상과 달리, 매너도 형편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환영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한글 메뉴가 있지만, 일부러 영어 메뉴로 체크인을 시작했다. 미리 예습한 덕분이다. 곁눈질로 슬쩍 확인한 아내의 모습은 예상대로였다. 살짝 놀란 표정이다. 


딱 거기까지만 순조로웠다. 이 망할 기기가 내 여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기계라는 게 원래 오류가 나기도 하는 거지. 다행히 아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몇 번이나 반복해도 결과가 같았다.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만 보여줄 뿐이다. 은근슬쩍, 기기를 바꿔서 시도해 본다. 마찬가지다. 멋진 남편이 되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마음뿐이다. 아내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기계와의 지루한 싸움이 끝난 것은, 순전히 아내의 중재 덕분이었다. 아내의 한 마디가 나를 기계에서 구원했다. 잃어버렸던 나의 이성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무인발권기 앞에 서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로 계속 방치했다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글리 코리언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기계가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직원한테 발권하자."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아내는 나를 다독였다. 내 기분까지 챙겨주면서 말이다. 


"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아내가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크게 말한 뒤, 무인발권기로부터 힘차게 돌아섰다. '내가 너무 몰입했나.' 그동안 항상 사람을 통해서 발권을 해왔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애초부터 직원에게 발권하려고 했던 사람처럼, 데스크를 향해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어. 셀프체크인 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야. 셀프체크인이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사례잖아. 원래 저런 그림자 노동은 하면 안 돼. 결국에는 그 피해가 고스란히 우리들한테 돌아오니까 말이야. 하마터면 그림자 노동할 뻔했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델타항공 담당 직원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기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다. 친절하고, 편안했다. 접수는 빠르고 매끄럽게 진행된다. '진작에 여기서 발권할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위탁 수화물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직원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진다. 그녀가 영어로 묻는다. 처음에는 수화물의 무게가 넘어갔다고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수화물이 23kg이 넘지 않는다고 두 번씩이나 강조했다. 


그녀의 영어가 그치질 않는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벼락치기 영어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그녀의 영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우리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갔다. 어떤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랜 눈칫밥으로 파악한 것이라곤,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심증뿐이었다. 답답했던 우리보다 더 답답해진 그녀가 드디어 도움을 청한다. 누군가를 호출한다. 


잠시 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여성이 천사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한국어로 설명하고, 한국어로 묻는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위탁 수화물 2개를 보내려면 모두 62달러를 추가로 더 내야 한단다. 캐나다까지 직항을 타면 추가 요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애틀랜타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단다. 한국말인데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 거죠?" 나의 까칠한 질문에, 그녀가 재차 설명한다. "국제선 위탁 수화물 비용은 무료가 맞습니다. 그런데, 국내선은 위탁 수화물 비용이 유료입니다." 이 말은 호놀룰루에서 애틀랜타까지는 국내선 요금이 적용된다는 뜻이었다. 미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델타항공의 규정이라는 말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모르던 정보였다. 국제선을 타는 것이라서 위탁 수화물은 당연히 무료일 거라고 알고 있었다. 수화물의 무게만 신경 쓰고 있었다. 델타 항공의 요금 체계를 뒤늦게 확인한 소득은 있었지만, 쉽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델타 항공을 타고 미국 안에서만 이동해도 수화물 요금을 낸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수화물 종량제를 추구하는 항공사의 정책이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접수대 앞에서 굳이 따질 마음은 없었다. 그냥 갑자기, 추가 요금을 내고 수화물을 싣는 것이 무척 억울하게 느껴졌다.


수화물 가방 2개를 어떻게 할 건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불쑥 참견을 한다. 그냥 들고 타면 안 돼? 아내의 말이 맞았다. 기내에 가지고 타면, 추가 요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호놀룰루 공항 안에, 수화물의 바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바퀴음이 유난히 경쾌하다. 기내까지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간단한 문제였다. 델타 항공의 규정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단지, 수화물을 발 밑에 두고 가느냐, 머리맡에 두고 가느냐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림자 노동 -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1981년에 발표한 개념. 임금에 기초한 상품 경제 사회에서 집안일처럼 보수나 대가를 받지 않고 당연히 하는 것으로 포장된 노동을 정의하기 위해 고안함. 셀프 주유, 셀프 발권, 가사 노동, 심지어는 취업 준비생의 스펙 쌓기도 그림자 노동의 범주에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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