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벼르고 별렀던 애틀랜타 공항에서의 식사는, 싱겁게도 패스트푸드로 결정되었다. 배 터지게 맛있는 것을 먹을 작정이었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애틀랜타 공항의 물가를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가가 만만치 않았다. 남아있던 일말의 식욕마저 싹 사라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른 아침 시간이라서, 메뉴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았다.
익숙한 브랜드는 이럴 때 적절한 위로가 된다. 저렴한 세트 메뉴가 있는 맥도널드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고민 없이 <오늘의 맥도널드 아침메뉴>를 주문했다. "우리도 같은 걸로 주세요." 받아 들고 나서 보니, 핫케이크다. 1인분인데, 자그마치 1300칼로리가 넘는다. 비행 후유증 탓일까? 원래 맛이 없는 걸까? 비행기 안에서 격렬했던 허기는 온데간데없다. 미국인들이 혼자서 먹는 양을 둘이서 나눠 먹어도, 양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핫케이크는 전혀 핫하지 못하고, 한 번 사라진 식욕은 돌아올 줄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공허하기만 하다. 허기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E31게이트 앞에서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렸다. 의자에 앉자마자,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가 갓 넘은 시간. 환승까지는 아직 2시간 이상 남았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애틀랜타 국제공항에 앉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본다. 공항 안은 한적하고 평화롭다. 주변에, 동양인은 우리가 유일하다. 여기가 멜팅팟 문화를 가진 미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장시간 비행에 지친 아내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 뒤로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가 보인다. 비행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주로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다. 새색시가 되기 위해 열심히 꽃단장 중이다.
오전 10시 40분에 DL4138편 탑승수속이 시작되었다. '10시 52분 출발인데 수속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아무래도 지연될 것 같은데.' 10분 안에는 절대 출발하지 못할 거라는 나의 예상은, 틀렸다. 비행기는 정시에 날아올랐다.
생애 처음 타보는 초소형 비행기였다. 탑승 전에 언뜻 비행기의 외관을 보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일 것이라고는. 비행기 선내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이 비행기가 얼마나 작은 비행기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순간, 내가 지금 비행기를 탄 건지, 열차에 탄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한 줄에 좌석이 4개뿐이다. 열차와 같은 구조였다. 동체의 길이도 짧았다. 열차 1대 길이보다 조금 긴 정도?
우리 좌석은 18A와 18B. 끝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앉은자리에서 기장이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출하게도, 스튜어디스도 단 한 명뿐이다. 한 명도 이 규모에는 사치스러워 보인다. 비행기가 아니라, 흡사 날개 달린 기차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는 신나서 난리다. "비행기가 너무 귀여워. 이렇게 작고 아담한 비행기는 처음 타 봐." 한동안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작은 비행기 칭찬에 여념이 없다.
사실, 비행기는 작을수록 위험하다. 작은 비행기일수록 사고가 날 확률이 더 높다. 덕분에 마음이 자꾸 불안해진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주변을 둘러본다. 50개 정도 되는 좌석에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모두 백인들이다. 대부분 말끔한 정장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었다. 모두들 비즈니스 때문에 토론토로 가는 사람들 같았다. 여행객은, 우리 둘 뿐이다.
<여행의 기술>을 꺼내서 읽어 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한 불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 몰래 눈을 감고서, 오랜만에 기도라는 걸 해본다. '무사히 토론토에 내리게만 해주세요. 그러면 내리자마자 착한 일 하나 할게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따라 유난히 비행기가 흔들린다. 작은 바람에도 날개 달린 기차는 연신 휘청거린다.
정오가 갓 넘은 시각. 드디어, 구부능선을 넘었다. 비행기가 토론토 하늘 위를 선회한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토론토는, 무채색이었다. 눈 앞의 보이는 것이, 도시의 색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색상이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사는 도시를 상상했던 나는, 현실적인 도시의 빛깔 앞에서 잠시 넋을 잃었다.
저 도시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차가운 입김이 제일 먼저 마중 나올 것이다.
활주로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모호했던 것들은 선명해지고, 희미했던 것들은 뚜렷해졌다. 무채색 안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은유는 사라지고, 현실 속의 건물들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하지만 발을 딛기 전까지, 토론토는 여전히 미지의 도시다. 토론토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완성되고 있었다. 불쑥, 이 첫인상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비행을 하는 여행자만의 특권이었다. 낯선 곳에 비행기를 타고 착륙하는 여행자만의 형벌이었다.
간절한 기도 탓인지 몰라도, 다행히 작은 사고도 없었다. 내리자마자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급할 것 없던 우리는 기꺼이 마지막 승객이 된다.
내리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짐을 옮기는 노동자들을 모습이었다. 온몸을 철통같이 감싸는 방한복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온종일 칼바람이 부는 공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풍경을 보면서, 아내가 말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 그렇지?" 하마터면 나는, 그건 성급한 일반화라고 말할 뻔했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라고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뒤늦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걸으면서 아내의 말을 자꾸 곱씹어 보니, 그 말이 좋아졌다. 토론토의 날 선 추위에 대한 걱정보다, 그 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을 먼저 생각하는 아내의 눈이 보기 좋았다. 하늘 위에서 보았던 무채색의 비밀을 알게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