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은 <빠른 환전>과 <숙소까지 무사히 찾아가는 것>
요란한 환영식 같은 건 없었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공간이었다. 그동안 공항에서 보아왔던 정신없이 분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차분함이 메꾸고 있었다. 모두들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어수선했던 마음도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갑자기 그 순간, 누군가 우리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출국장 앞에 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상상뿐이었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앞서가는 누군가가 갑자기 뒤돌아 서서, 불쑥 말이라도 걸면 어떡해야 하나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토론토에 오신 걸 환영해요라고 인사라도 건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낯선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면서, "왜 이제야 왔어?" 그렇게 한 마디 내뱉어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예상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상관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어쩌면 공기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의 공기는 차가움과 따뜻함 사이에 정확히 걸쳐 있었으니까. 과한 느낌의 따뜻함도 아니었고, 과한 느낌의 차가움도 아니었다. 정확히 그 사이에 있는 균형 잡힌 공기였다. 이런 공기에서 숨을 쉬면, 누구라도 침착해질 것이다. 그 공기는, 호놀룰루에서 힘들게 구한 가을점퍼가 딱 들어맞는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온도였다.
세 번째 입국카드를 쓴다. 처음에는 잘못 적어서. 두 번째는 마음에 안 들어서.
아직도 입국카드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행위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덕분에 입국심사대의 마지막 심사객이 되었다. 텅텅 비어 있는 입국심사대를 향해 걸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모든 입국심사관이 동시에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짓는 심사관 쪽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다음부터 입국카드는 미리미리 작성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 캐나다에 온 목적은 뭡니까?
(저희 부부는 비아레일을 타고 캐나다를 동서로 횡단할 거예요) 여행.
- 캐나다에 얼마나 있을 예정입니까?
(여건만 된다면, 계속 머물고 싶어요) 16일.
- 어디서 숙박할 예정입니까?
(맨 처음에는 민박을 할 거예요. 기차에서도 잘 거구요. 호텔도 염두에 두고 있긴 해요.) 호텔
- 여행 내내 호텔에서 묵을 예정입니까?
(아! 그러니까 민박, 기차, 호텔 등 여기저기에서 묵을 것 같네요. ) B&B 그리고 호텔.
- 토론토에만 계속 있을 예정입니까?
(아니. 저희는 비아레일을 타고 캐나다를 횡단한다고요) 토론토 5일, 바아 레일 4일, 재스퍼 3일, 밴쿠버 4일.
- 즐거운 여행되세요.
입국 심사관의 희미한 미소가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대화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애초부터 웃는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웃는 인상을 지닌 그의 입에서는, 다행히도 예상했던 질문만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답변들은 끝내 현실 속의 소리 영어가 되지 못했다. 채 정제되지 않은 답변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재정 상태에 관한 질문이 채 오가기도 전에, 입국도장이 찍혔다. 입국심사관과 여행객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면, 커피 한 잔을 나누어도 어색하지 않을 대화였다. 그는 틀림없이 우리의 여행에 대해 과분한 조언을 했을 것이다. 웃는 인상 아래 감춰진, 호기심 어린 그의 눈빛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의 미션 두 가지는 ‘빠른 환전’과 ‘숙소까지 무사히 찾아가는 것’이다. 그 이상의 계획은 과분하다. 환전은 최대한 빠르게 돈을 바꾸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수중에 캐나다 돈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서,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다. 심리적인 안정을 빠르게 되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현실적인 이유도 물론 있었다. 당장 버스를 타기 위해 토큰도 사야 했고, 간단한 요기라도 해야 했다.
입국심사대를 나서자마자, 첫 번째 공항 환전소에서 멈춰 선다. 한가한 환전소였고, 때마침 직원이 우리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미화 300달러를 꺼내 놓자, 옆에 있는 포스터를 가리킨다. 포스터는 500달러 이상을 환전하면 환율우대가 있다는 광고였다. 우리가 가진 게 이게 전부다. 우리의 정직한 대답에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거 참 유감이네요."
환전은 순조롭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미화 300달러가 사라진 자리에, 캐나다 325달러가 놓인다. 직원은 다시 한번 포스터를 가리킨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수중에 미화 300달러밖에 없다는 것을 끝내 안 믿는 눈치다.
캐나다 325달러를 들고 돌아서는 우리를 보면서, 그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손은 끝까지 포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유감스러운 행동의 의미는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네트워크가 연결되자마자, 궁금증을 찾지 못하고 환율부터 검색해 보았다. 그 날의 환율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아무리 급해도 첫 번째 공항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이었다. 웃는 직원은 더욱더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환전한 캐나다 달러로 제일 먼저 한 일은,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걸어간 것이었다. 캐나다의 물가를 온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한 번 각인된 캐나다 물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여행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스니커즈 초콜릿 2개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가격 스캔이 끝난 계산대 앞 LCD창에는 $5.75라고 적혀 있었다. 잠시 동안, 착오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니커즈 초콜릿 두 개를 들고 살짝 흔들어 보였다. 직원이 고객을 끄덕인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받아 든 영수증에는 초콜릿 개당 가격과 $5.75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기분이 께름칙하고, 얼떨떨했다.
아내가 그 초콜릿을 다 먹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디 단 스니커즈 초콜릿을 먹으면서, 다시는 공항에서 스니커즈 초콜릿을 사 먹지 않겠다고 세 번씩이나 다짐했다.
공항에서 토큰 3개를 샀다. 남는 토큰 1개는 보험용이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한국에서는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토큰을 토론토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토론톤에서 파는 토큰은 한국의 토큰과는 다르게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지 않았지만.
공항 밖 C12존까지 200미터 정도 걸어야 했다.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하마터면 다시 공항으로 뒤돌아 들어갈 뻔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추위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 추위라면, 한국에서도 숱하게 겪어보았다. 그런데 하와이에서 날아온 미천한 몸이 적응할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미처 적응을 하지 못한 몸이 움츠러든다. 입김을 내뿜는다. 입에서 튀어 나간 입김을 보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C12존 앞에서 황급히 192번 버스를 탄다. 토큰을 내면서, 기사에게 트랜스퍼 티켓, 플리즈 (Transfer Ticket, Please)라고 말하니 정말로 기다란 환승 표를 건네준다. 키플링 역에서 지하철로 환승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환승 표를 미리 챙겨놓아야 했다.
키플링 역까지는 3 정류장뿐이었지만, 정류장끼리의 간격이 넓었다. 덕분에 키플링 정류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충분한 사색의 시간이 보장되었다. 따뜻함과 여유를 되찾은 몸이 그제야 버스 안을 둘러보게 만든다. 버스 안의 승객들 모두 겨울에 충분히 대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옷차림새 마저 세련돼 보인다. 호놀룰루에서 아무 옷이나 걸쳐도 세련돼 보이던 우리였는데, 이 곳에서는 신경 써서 차려입어도 패션 테러리스트로 전락할 듯싶었다.
내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창가에 있는 노란 줄을 잡아당겼다. 누르는 방식의 한국 정차벨보다 더 아날로그 해서, 그나마 인간적이라고 아내는 좋아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내릴 때가 다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누르는 벨과 잡아당기는 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 벨은 단순히 기능과 외관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줄을 당기는 순간, 나는 분명히 느꼈다. 오랫동안 누르는 방식의 정차벨에 적응된 사람의 손에 무언가 흐르는 걸. 한국의 버스 안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짜릿한 손맛이 온몸에 전해졌다. 버스는 나를 붙잡고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버스와 연결되었습니다'. 오직 효율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온 여행객이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는 순간이었다.
키플링에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최종 목적지는 핀치역이다. 2라인을 타고 가다가, Bloor-Yonge 역에서 1라인으로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 안 승객들의 표정은 차갑고, 무표정하다. 눈이 마주쳐도 잘 웃지 않는다. 웃거나, 웃으려고 하거나, 웃을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무채색의 옷처럼.
아내는 사람들의 그런 표정을 날씨가 추운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안면근육이 굳은 탓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사람들 몰래 억지로 한 번 웃어본다. 안면근육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이제 막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토론토의 비밀 하나를 알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