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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Mar 27. 2017

한식의 힘

토론토에서 먹은 한식

토론토에서는 모두 5일을 머물렀다. 한 도시에서, 5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도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 도시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부족해서, 더 소중한 5일이었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5일간 묵었던 숙소 이야기다. 숙소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여행 이야기를 풀어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좋은 추억들도 나쁜 추억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우리의 소중한 여행 이야기가 그렇게 기억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직도 애증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숙소의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이유다.



토론토의 숙박을 정하던 날로 잠시 돌아가 본다. 호놀룰루에서 아내가 처음으로 토론토 숙소 이야기를 꺼내던 날, 나는 사실 탐탁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인민박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짜 캐나다 숙소를 원했다. 캐나다 문화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숙소에 묵기를 바랐다. 토론토까지 가서, 일부러 한인민박을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좀 더 남쪽 방향에 있는 이스트 요크지역을 선호했던 이유다. 


아내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녀는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하고, 저렴하고, 말도 잘 통하는 숙소를 원했다. 자기가 자청해서 적극적으로 토론토 숙소를 찾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모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내를 차마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숙소를 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구한 숙소가 내 마음에도 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기 어때?" 마치 광고 카피 같은 그녀의 물음이 귓가에 울리는 순간. 거의 동시에 사진 하나가 불쑥 시야를 덮친다. 역시나 한인민박이다. 어떻게 싫은 내색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내가 재빠르게 꿀팁 하나를 보탠다. "이 집 말이야. 유명한 ㅇㅇㅇ가 묵었던 집 이래." "진짜? 우리가 아는 ㅇㅇㅇ?" 그 말을 듣고 나니, 호기심이 슬쩍 동하기 시작한다.

"이 집 가격이 얼만지 알아? 하루에 60달러 밖에 안 해." 가격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래, 고민은 그만하고 거기로 결정하자.' 마침내, 토론토에서 묵을 숙소가 결정되었다. 모처럼만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서로를 칭찬했다. 절대로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다고, 그 순간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 뒤로, 아내와 집주인 사이에 카톡이 몇 차례 오고 갔다. 신기했던 것은, 우리가 그 집에 묵고 싶어 했던 것 몇 배 이상으로, 집주인이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하와이에서 온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말이다.



우리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묵게 될 숙소는 핀치역 인근에 있었다. 핀치역은 새로 생긴 한인타운이 있는 곳이었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에서 핀치역까지는 동북 방향으로 약 23km. 버스로 40분 거리이고, 버스와 지하철을 모두 이용한다면 넉넉히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버스도 타보고 싶었고, 지하철도 타보고 싶었다. 환승은 어떻게 하는지 미리 알아두고 싶었다. 일부러, 공항에서 핀치역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핀치역에 도착했는데, 숙소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숙소 지도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실시간 위치 추적이 되지 않는 지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지도, 그래서 경로 파악이 되지 않는 지도는, 길치의 눈을 더욱 어지럽혔다. 


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핀치역 인근을 두 바퀴를 돌았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거리를, 트렁크까지 끌면서 말이다. 거리의 눈 청소를 하시는 분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쫓아와서 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더 난감했던 것은, 두 바퀴를 돌고도 결국 숙소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낯선 이국의 땅에서 만용과 고집을 잔뜩 부린 대가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몸도 녹이고, 실시간 위치가 제공되는 맵도 볼겸, 카페에 들어갔다. 인터넷에 연결되자마자, 카톡이 불을 뿜는다. 숙소 주인이 왜 여태 안 오느냐고 난리다. 어디인지 알려주면, 차로 데리러 나가겠다고 한다. 갑자기 마음이 환해졌지만, 길치의 존심이 끝내 고집을 부린다. 수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내 발로 숙소를 찾았다. 


우리가 집주인으로 알고 있던 집주인은 진짜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집주인의 아들이었다. 숙소의 진짜 주인은 아들의 어머니였다. 집주인의 아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왠지 쌀쌀맞았다. 아들은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그렇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이 많이 아프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토론토에 도착한 첫날 저녁은 한식을 먹겠다고 일치감치 작정했었다. 집주인의 아들에게 맛있는 식당을 물었더니, 핀치역 인근의 식당 소개가 끊이지 않는다. 너무 많은 식당을 한꺼번에 이야기해 주어서,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 많은 식당 중에서, 죽기 전에 먹을 하나의 음식을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한 곳을 추천해 준다. 죽기 전에 먹을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곳은 한국인이 추천하고, 한국인이 운영하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식당이었다. 들어가는 순간, 서울 시내 한 복판으로 순간 이동한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어 환영인사와 익숙한 좌식문화의 식탁이 우리를 맞는다. 더 신기했던 것은, 몇몇 식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국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토론토 한인타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가격 때문에 잠시 숨이 멎긴 했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돈 생각하지 않고 먹기로 작정했다. 호놀룰루를 떠나온 순간부터,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싼 해물찌개를, 더 비싼 한국어로 주문한다. 고대하던 해물찌개를 만나는 순간, 아내는 왕성한 식욕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식사의 값어치와 맛을 논할 필요도 없이, 해물찌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자, 나는 헐크가 되어 있었고, 아내는 블랙 위도우가 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흘리고 다닌 기(氣)를 한꺼번에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것을 ‘한식의 힘’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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