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 더위에 몸은 완벽하게 적응을 끝마쳤다. 아내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선크림을 매끄럽게 펴 바른다. 짙은 버터 향 나는 선크림에도 거부감이 없다. 오래된 체취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낯선 선크림 향에 적응하는데, 자그마치 3주나 걸렸다. 그에 비례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생소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익기 시작하면서, 마음도 서서히 초점을 잃어갔다. 모처럼 하겐다즈 망고 아이스크림이 파격 세일했던 그 날은, 호놀룰루에서 지낸 지 정확히 22일째 되던 날이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는데도, 아내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망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표정이 왜 그래?" 결국 주제넘은 참견을 하고 말았다. 무심하게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가져갔던 아내가 스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자기는 하나도 안 불안해?" "뭐가?" "조금 있으면 한 달이 다 되는데, 불안하지 않아?" "그게 뭐?"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결정된 게 하나도 없잖아." "아! 그거 때문이었어?"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어?" "그게 계속 신경 쓰였어?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슬슬 생각해 보지 뭐." 아이스크림은 자꾸 녹아내리는데, 아내의 추궁은 좀체 멈출 생각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할 때가 된 것이다.
세 가지 선택을 놓고 가늠해 보았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했지만, 결국에는 세 가지 범주로 수렴되었다.
01 돌아간다.
02 계속 머문다.
03 다른 곳으로 간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일단 제외했다. 나도 싫었고, 아내도 내켜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두 달은 버틸 각오로 집을 떠나 왔는데, 어정쩡하게 중간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남은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와이에 계속 머무는 것과 하와이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마음의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부터 아내는 정신없이 세계 각국을 옮겨 다녔다. 아침에 칠레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점심엔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둘러보았고, 저녁에는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블로그를 들락거리면서, 경우의 수를 계속 확장하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늘어만 가는 경우의 수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단순해져야 했다. 일단 하와이에 계속 있을 건지, 벗어날 것인지 그것만 놓고 따져보기로 했다.
운명처럼, 우연히, 영상을 하나 보았다.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단순한 실수였다. 클릭 미스였다. 열차가 달리는 영상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광활한 대지를 열차가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비아레일이라 적혀있는 열차가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냥 열차가 달리는 게 전부였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오른손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아내를 불렀다. 아내에게도 영상을 보여줬다. 아내도 나와 같았다. 나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심장을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도, 나도, 조금씩, 조금씩,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심장은 그 여느 때보다 힘차게 뛰고 있었다.
"우리 캐나다에 열차 타러 갈까?" 아내가 물었다.
"그래. 열차 타러 가자." 내가 화답했다.
함께 영상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