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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Oct 15. 2016

소식이 천천히 전해지는 세계

런던 여행 3 - 여행 첫날 내셔널 갤러리!

영국의 문화적 힘과 자부심에 막강한 경제력까지 온몸에 확 와 닿는 순간이 있다. 갑자기 피곤한 다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것만 같고 쥐고 있는 생수병에서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빨아 마셔야 할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은 내게 값으로 매길 수도 없는 진귀한 회화와 조각으로 가득 찬 미술관과 박물관 대부분을 무료로 개방한다는 믿지 못할 여행 팁을 읽을 때였던 것 같다.


화장실 사용 시 50 센트까지 알뜰하게 챙기는 독일과 10 유로는 거뜬하게 넘기는 스페인의 박물관 티켓과 비교해 보니 이렇게 무료입장을 시행하는 영국의 배포는 내게 거의 입장료 따위로 돈 벌 필요 없다는 자부심 강한 메시지처럼 읽혔다. 영국에서, 그것도 다른 곳을 거의 다 포기하고 런던 한 곳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달콤한 문화적 단맛이 한몫을 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던가? 달콤한 설탕의 나라이며 달달한 이 맛을 위해 전쟁까지 불사했던 나라 아니었나 말이다. 그러니 이 나라에 쌓아 놓은 문화는 또 얼마나 달달하고 중독적일지 그 죽음의 맛을 한 번 보기로 했다.


여행 첫날부터 달달한 벤스 쿠키처럼 내셔널 갤러리가 나를 유혹했다. 사실 사부작사부작 탐색전을 치르던 첫날에, 어둡고 흐리고 곧 빗방울이라도 쏟아질 듯한 이 날씨에는 길 모퉁이 카페에서 라떼 한 잔 홀짝이며 감상에 젖는 일반적인 리듬이란 게 있는데 그 순간 하필이면 내 시야에 포착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여행 첫날이었지만 오후가 되자 니체가 '놀이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순수한 즐거움으로 충만했던 그 아이는 이미 빅벤과 왕궁을 거쳐오며 사라질 기미가 보였다. 이날은 런던과 딱 어울리는 날씨였고 묘한 회갈색의 여름 하늘에는 켜켜이 쌓인 구름 사이로 한 가닥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트라팔가 광장과 넬슨 제독과 수많은 다국적인 인종이 벌이는 이국적인 향연과 한여름 공기 속에 퍼져 있는 'take away' 커피 향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피곤한 몸과 저 도로 건너 몇 블록 가지 않아 명성 자자한 차이나 타운도 유혹적이었지만 이 날씨, 이 구름, 이 하늘 아래 가장 런던적이어서 매력적이었던 곳은 단연 내셔널 갤러리였다.


욕심이었다. 아니 관심이었나? 나의 관심은 주로 시각 예술로 향해 있었고 서서히 수십 년에 걸쳐 흥미와 무지를 오가며 간혹 접해보던 회화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접했던 사소한 인상들이 어느덧 모여 마음속 어디선가 나만의 갤러리를 만들어갔고, 그 공간은 점 점 더 커져갔고 그래서 더 많은 그림들이 필요했다. 저기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내 마음의 갤러리가 더 풍족해질 것만 같았다. 혼자만의 여행에 이런 지주라도 없었더라면 얼마나 휘둘렸을까... 이런 가치, 나만의 풍향계, 그대를 위한 시처럼 매어 놓는 노란 깃발 같은 것 말이다.


트라팔가 광장의 어마어마한 관광객 인파는 쓰나미처럼 사색과 관조의 여유를 쓸어가 버렸고 그래서 더욱 내셔널 갤러리 안으로의 도피는 즐거웠다. 그렇게 들어간 내셔널 갤러리도 복잡스럽긴 마찬가지였으나 나를 반긴 건 첫 번째 방에서 만난 크라나흐였다. 밑의 그림은 '루카스 크라나흐 시니어 Lucas Cranach the Elder'가 그린 <비너스에게 불평하는 큐피드 Cupid complaining to Venus> ca. 1560.이다. 내셔널 갤러리 초입에 걸려 있어 안 보고 지나갈 수 없는 크라나흐의 이 그림은 꽤나 재미있는데, 어린 큐피드가 비너스에게 "나, 벌에 쏘였어요.. 힝.."하고 칭얼대면서 한 손으로는 벌 떼를 쫒고, 다른 손으로는 훔쳐 온 벌집을 비너스에게 보여준다.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저 위, 비너스가 팔을 뻗어 탐스런 열매가 열린 가지를 쥐고 있는 저곳을 자세히 쳐다보면 빛바랜 글씨가 보인다. 저 라틴어 시구를 영어로 번역하면 "Life's brief pleasure is mixed with pain"이 되고 이 그림은 사실 인생의 조그만 기쁨에도 고통이 수반된다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 된다. 내가 처음 크라나흐를 만난 것은 거의 10여 년 전 독일 바이마르에서였다. 나는 그때 크라나흐를 독일 변방의 그저 그런 화가로 생각했었고 레지덴츠에 걸려 있던 다수의 크라나흐의 그림들을 대충 흩어본 것으로 기억한다. 생소한 이 화가에 나는 무지했었지만 호기심 많고 많이 어렸던 그때가 생각나서 나의 무지를 포용 하듯 새삼스레 애정을 가지고 한참 동안 쳐다보다.



나에게 유럽 시각 문화의 뿌리를 보여주는 신화를 꼽으라면 대중적인 인지도 측면에서 단연 <디아나와 악타이온 신화>를 꼽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비드의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n>에 나오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처녀 사냥 신인 디아나(아르테미스)는 사냥꾼인 악타이온이 우연하게 자신의 벗은 몸을 보자 징벌의 의미로 그를 사슴으로 변모시킨다.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하자 그의 사냥개들은 그를 물어뜯어 종국에는 갈기갈기 찢게 죽게 된다는 잔인하고 슬픈 언뜻 보기엔 이해도 잘 안 되는 이야기다. 왜 '본다'는 것이 징벌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인문학적인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여러 신화 속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게르만 신화에서 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기꺼이 한쪽 눈을 잃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예언자는 다름 아닌  먼 테이레시아스로 설정되어 있다. 감히 물질적인 눈을 통해 지혜를 갈구하거나 신을 보려는 시도는 죽음을 대가로 하는 것이며 지혜란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비유인 것이다. 악타이온은 이 금기를 깨고 처녀의 신인 디아나의 몸을 본 것이다. 신을 쳐다본 것도 모자라 더욱이 처녀의 몸을 본 악타이온은 두 가지 죄를 지었기에 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 그 대가를 치르는 악타이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접사로 당겨서 자세히 보니 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 가혹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읽은 이 책은 서양의 시각문화를 다룬 깊이 있는 인문학적 저서였다. 글 읽는 재미와 정보가 동시에 들어있는 쉽고 깊은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책을 내셔널 갤러리에서 다시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은 이런 낯선 기억들을 늘 소환한다. 그래서 기억은 더 또렷해지고 사고는 풍성해지며 시냅스의 연결도 어느 방향에서 이뤄질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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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갤러리에서 세잔을 다시 만났다. 늘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라면 왜 그렇게 다 비슷해 보이는 사과만 강박적으로 그렸을까? 였다. 세잔이 활동하던 당시인 19세기 말만 해도 단일 시점으로 대상을 포착하는, 즉 그림이란 현실의 한 조각을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인 화가가 한 방향에서 본 대로 그리는 것이 통설이었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이 이 기준에서 조심스럽게 일탈했지만 이들의' 복수 시점'은 대상을 더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세잔은 노골적으로 여러 시점에서 본 사과를 그렸다. 이렇게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잡아 화면 위에 그리는 방식을 구성주의 (constructivism)라 한다. 바로 이 다중 시점 덕분에 그는 르네상스 이후 확립된 모든 전통을 끊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고 비로소 현대미술의 터를 닦게 된다. 하지만 지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잔보다는 애플 사의 한 입 베어 물은 사과가 더 먼저 떠오르니 세잔도 옛날 사람 다 됐다.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Water Jug, 1892-3년.


르네상스를 떠 올리니 영국 팝 아트의 대표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Hockney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000년도에 <은밀한 지식. 옛 거장들의 사라진 기법의 재발견 Secret Knowledge: Redis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천재성에 대한 모욕이라는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미술계에 엄청난 논란을 가져왔고, KBS의 한 프로그램은 세트장까지 준비해 가며 2003년도 10월 <명화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의 내용을 독자에게 보다 더 쉽게 설명하려는 관심과 열정을 보였다. 호크니는 이 책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르네상스 그림들이 어떻게 그 옛날에 그려졌는데도 드로잉의 흔적이 전혀 없으며 오직 눈대중만으로 갑옷의 빛 반사, 옷의 주름 같은 정확한 세부묘사와 자로 잰 듯한 원근법을 표현할 수 있었는지 였다. 


호크니는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며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이 시기의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를 사용한 광학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는다. 화가들이 렌즈를 투과하여 캔버스에 투영된 모델의 영상을 따라 그대로 그려냈기 때문에 미세하고 정교한 인물 표현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크니가 여기에서 거울과 렌즈를 사용한 기술로 표현한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 (‘검은 방’ 또는 ‘어두운 방’)였다. 세잔은 이 전통을 끊어낸 것이다. 재현이 아닌 창작의 길, 주관과 개념이 대두되는 그런 현대 예술이 시작된 것이다.


사과! 사과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과일이 또 있을까... 선악과 비유에 나오는 태초의 사과부터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 낸 뉴튼, 윌리엄 텔이 화살로 맞춘 머리 위의 사과 한 알, 애플 사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물은 사과까지.... 하루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무서워한다는 속담도 새겨났으니 정말 사과야말로 인류에게 엄청난 영감을 준 뮤사이임에 틀림없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사물을 적절히 배열하면 물체나 면의 각 변은 하나의 중심점을 지향하게 됩니다. 지평선에 평행한 여러 선은 넓이를 줍니다. 그것은 자연의 단면, 다시 말해 전지전능한 아버지 영원의 신이 우리들 눈 앞에 펼쳐 놓은 광경의 단면을 줍니다. 반면 지평선에 수직으로 걸친 선은 깊이를 줍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연은 넓이보다는 깊이로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빨강과 노랑으로 재현되는 빛의 진동 속에서 공기를 느끼게 하려면 충분할 만큼 파랑을 칠해 넣어야 합니다.- 폴 세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0934


이 작품도 얼핏 세잔의 작품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위트 있게도 내셔널 갤러리는 슬쩍 폴 고갱의 사과 그림 하나를 세잔의 사과 그림들 사이에 걸어 놓았다. 세잔에 대한 오마주로 고갱이 1890년 경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이 사과 작품은 비록 나이프나 사과에 비친 빛의 반영 같은 것이 세잔의 구성주의 영향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도자기로 만든 커다란 맥주잔에 고갱이 1886년 이래로 자주 방문하던 이국 땅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명백히 프랑스 서부 풍경은 아니다. 여하튼 미술관에서 이런 센스 넘치는 전시를 대하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생각을 순간 접고 피식 웃게 된다. "뭐야, 깜박 속을 뻔했잖아!" 미술관 기행이 더욱 재미있어지는 순간이다.



폴 고갱 <창문 앞에 놓인 과일 접시와 큰 잔 (Bowl with Fruit and Tankard beforre a window)>, 1890 년경.


밑의 그림은 그 유명한 고흐의 <해바라기>, 세잔 옆에 고갱! 그 고갱 옆에 고흐를 전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역시 여기도 고갱 옆에 고흐 그림이 포진해 있다. 1924년에 내셔널 갤러리는 이 유명한 고흐의 작품을 사들였다는데, 여기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의 이 <해바라기> 1888를 볼 줄은 상상도 못 하였기에 뜻밖에 접하는 이 해바라기는 무척 나를 기쁘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작품이었고, 붓 터지는 강렬했으며 노란색 해바라기 속에서 씨앗은 잘 익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노란색을 희망과 우정의 색으로 생각했던 고흐는 스스로도 이 작품을 참 좋아하여 손님방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절친 폴 고갱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저 터치감! 겹겹이 엉겨 붙은 저 유화 물감의 질감은 그 어느 복제품에서도 보지 못했다. 


인상주의는 빛을 그렸다, 아니 빛이 주는 인상,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인상을 아뜰리에에서 재현하려고 애쓴 화가들이었다. 그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방법을 내셔널 갤러리가 잘 보여준다. 어두운 벽, 저 밝은 물 색, 오로지 저 그림 하나에 이 전시실의 조명을 모두 집중시킨다. 그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그 찬란한 빛 속에 인상주의가 각인되니 역시 빛의 화가들이라는 찬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모네 <지베르니의 연못 The water Garden at Giverny>

내셔널 갤러리에는 이미 사들인 인상주의 작품 외에도 새로 대여한 모네와 고흐의 작품들이 대거 전시 중이다.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앙리 루소, 고흐 외에도 틴토레토 작품도 몇 점, 다 빈치 작품도 몇 점, 클림트 작품도 한두 점 골고루 포진해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못 봐서 아쉬운 마음 한 가득이었지만 어디선가 보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셔널 갤러리를 나왔다.

 

이곳에서 휴대전화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니 새삼 사진사는 활시위를 당긴 채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인 한 방에 사슴의 목덜미를 끊어야 하는 화살처럼 우리는 여행지에서 시야에 들어온 대상을 가장 잘 잡아낼 결정적인 한 방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디지털 유목민인 현대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며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신석기시대 유전자에 내장된 저장의 유전자를 가동한다. 그림 감상 대신에 그림 포착의 시대다. 트라팔가 광장을 가득 매운 여행객들, 미술관을 찾는 스마트폰 유저들에게 '나와 트라팔가 광장', '나와 고흐의 해바라기'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여행의 의미로 남는다면 그들은 순간을 포착하는 사냥꾼의 피를 간직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냥꾼들!


예술작품을 보고 '경탄할 수 있는 근원적인 능력'은 어려운 과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적인 구분을 모르며 상이한 시간대의 자료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불러내는 컴퓨터 시대에 어떻게 '과거'라는 타자를 대해야 하는지는 요원한 과제다. 어린아이처럼 경탄하고 감탄하며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 그런 자세를 잃지 말라며 이날 내셔널 갤러리는 나를 배웅하는 듯했다. 



제목 출처:  라비니아 그린로 (Lavinia Greenlaw)의『소식이 천천히 전해지는 세계(A World Where News Travelled Slowly) (1997)』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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