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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Jan 21. 2017

구시가지에 주피터와 미네르바가!

 본 Bonn 1 - 본 구시가지에서 뜻밖의  신들을 만났다.

1월 1일, 2000년대의 끝 두 글자가 17로 바뀌며 '그'가 죽은 지 어느덧 100년의 세월이 지나고 또 시간이 흘러 10년 모자란 200년을 채워 간다. 이 190년이나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유로운 영혼 베토벤은 감미로운 '달빛 소나타'로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하고 우레와 같은 합창으로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기도 한다.


베토벤의 도시 본 Bonn은 2000년도 독일 통일 전까지 독일 연방의 수도였지만 정치적 중심지의 위용은 커녕 아주 조그만 동네라서 사람들은 아마 베토벤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더 잘 알고 있을것이다. 본은 옆 동네 쾰른이나 주도인 뒤셀도르프에 비해 무척 작은 도시고, 아니 사실 도시도 과분한 표현이고 도심지 한 구역만 벗어나면 대부분 '마을 dorf' 단위의 작은 촌동네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중심지가 단 한 곳인데 그곳이 바로 본 시내다.


이 작은 도시 본에 이러저러한 일로 참 여러 번 다녀갔다. 길게는 6개월도 넘게 살았고 짧게는 한 두 주씩 지내면서 어떻게 이 지독하게 작은 곳에서 외롭고 썰렁한 독일의 나날을 보낼까 머리를 싸맨 적이 많았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고 있는 곳이 아마 대도시라서 이곳에서 더 세상 밖으로 내쳐진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잡초 같은 나무 한 그루, 그 위의 까마귀 한 마리, 시커먼 회색 하늘, 이보다 더 외로울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본이라는 '마을'에 오래 살아보니 자연이 공감각을 대동한채 소리와 색채와 향기로 훅 들어온다. 한 여름 밀밭에서는 잘 익은 밀알이 툭.. 툭.. 투두 득 터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울려 퍼지고, 세상에... 밀알 터지는 소리라니, 아니 그 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하던지! 접해 보니 자연은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사방에서 요란법석 난리였다. 생전 처음 본 밀알들, 처음 듣게 된 잘 익은 밀알이 타다닥 터지는 소리... 길 한가운데 무더기로 쌓여있는 말의 똥 냄새,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자전거 소리, 나무 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암젤 새 소리... 밀밭 구경도 처음, 기계로 수확하는 모습도 신기, 길가 잡목처럼 무성했던 복분자들, 요란한 자연의 향과 소리와 색채가 난무한 자연이 공존하는 본이었다.


생각해보니 또 어느 쓸쓸한 가을날, 가을 같은 한여름에 아니 봄 같은 어느 겨울 날씨에라고 할까... 어느 계절이나 비슷한 이 회색빛 독일 날씨 - 우리에겐 너무나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이지만 - 늘 어둡고 칙칙하고 비바람 부는, 그러다 잠깐 정말 보기 힘든 예쁜 햇살도 비취는 독일의 가을 정취를 바바리 코트 깃 여미며 마음껏 느끼기도 했다.


밀밭

관광지로는 한 나절 코스로도 충분한 곳이지만, 살아보면 크고 작은 콘서트가 열리는 곳, 약간은 촌스러운 사투리로 그네들의 맥주를 칭송하는 라인 서쪽 지방 사람들이 사는 곳! 또 오래되어 아름답게 영락해가는 묘지가 있고 그곳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노숙자들을 영 마뜩해하는 묘지관리인 아저씨와 잡담을 나눌 수는 곳이 본 같은 작은 도시가 지닌 매력이다.


호텔에 구비되어 있은 관광지 소개 팸플릿을 둘러보다 '구시가지 altstadt'가 눈에 확 띄였다. 오호! 그래 오늘은 이곳을, 본의 외곽이라 관광객의 시선에 서 먼 이 구역을 걸어봐야겠다. 베토벤 하우스가 있는 '본너가세(본의 골목길)'거리를 지나 고즈넉한 '구도시 altstadt'를 거쳐 본의 오래된 '구 공동묘지 Alter Friedhof'까지 돌아보는 긴 산책길이다. 


본너가세 Bonnergasse라고 쓰인 골목길에 있는 베토벤 생가! 이렇게 눈에 안 띄게 관광명소를 홍보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생각될 만큼 베토벤이 태어난 이 집은 무채색과 중간색, 평범함의 극치를 달린다. 휙 지나칠 일은 없다, 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니~


베토벤 생가 앞

이 베토벤 생가를 들른 후 좀 더 길 안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본에서 가장 유명한(?), 사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본의 유명한 호프집이 나온다. 이곳에 들러 낮술 한잔 하는 것도 괜찮았다. 각 지역마다 고유한 맥주가 있고 아예 대놓고 낮술 권하는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로 전 세계의 애주가들을 불러 모으는 독일에서 이 작은 마을 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실 본보다 쾰른의 '쾰쉬 Koelsch'와 경쟁관계에 있는 이웃 도시 뒤셀도르프의 '알트 비어 Altbier'에 치여 본에도 지역 고유의 맥주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쾰른에 빗대어 여기 맥주는 '뵌쉬 Boennsch'라고 한다. 크~~ 이런 위트! 뵌쉬라는 말을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돌았다. 쾰쉬가 아니라 뵌쉬라니..노랗고 맑은, 거품 뽀글 봉구비어 같은 뵌쉬 생맥주 한잔, 신선한 맥주 거품 살짝 얹힌 200 cc 짜리 앙증맞은 잔에 담긴 낮술 한 잔에 본의 매력이 배가 되었다. 시원하게 목 넘김 좋은 뵌쉬 한 잔 한 후 조금 직진하다 보면...


본의 유서깊은 맥주 집

기능면에선 뛰어나겠지만 흉한 콘크리트 고층 건물이 나온다. 본에서 거의 유일하고 가장 흉하며 생뚱맞게 보이는 신시청을 지나 '구도시 Altstadt'라는 표식이 길 사이에 걸려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여기부터 아주 조용한 주거지가 시작되는데, 생각과는 달리 비교적 좁은 골목길에다 그다지 우와~~ 하는 탄성을 자아내는 상점도 없고, 눈길 확 사로잡는 멋진 건축물도 없다. 그저 조용한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고즈넉한 골목길 하나... 부촌의 이미지도 아니고 문전성시 상가도 없으며 아주 조용한 이 골목길의 탐방에 나선다. 그래서 대문이며 집 장식이며 더욱 자세히 보게 되는 길이다. 


봄이면 어땠을까? 하나비...이곳은 독일에서 찾아 보기 힘든 벚꽃길이다. 찬란한 도깨비불처럼 순식간에,  가장 화려할때 한 웅큼씩 떨어져 내리는 꽃비를 선사하는 이 벚꽃길은 장관일 것이다. 지금은 신선한 연녹색의 그늘길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구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그 곳을 알리는 표식 Altstadt

나의 시선은 독일식 건물 스타일과 닫힌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과 그 앞 창문턱에 데코된 화분과 인형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새로운 뭔가에 대한 갈망에 무딘 발걸음은 초조해졌다. 이렇게 어느새 일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고향 같은 외국이 아쉽고, 그래도 긴 시간의 비행 후 다시 찾은 이곳에 대한 안이한 인상이 아쉬워 뭔가 다른 것, 뭔가 나의 무뎌진 말초신경을 깨우는 낯설고 이국적인 어떤 것, 이방인으로써 호기심을 느낄 수 있는 뭔가를 정말 발견하고 싶었다. 바로 여기, '헤어슈트라세 Heerstrasse'쯤에서는 마침 그 날 모든 집에서 내놓은 쓰레기 통을 치우는 날인지 청소차마저 내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형국도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어딘가에선 돌파구가 있어야 했다.

 


내 앞에서 천천히 발길을 막다가 어느새 앞서 가다 보면 뒤를 쫓아오는 청소차! 내 후각은 점점 예민해졌고 청소차임을 알리는 경적 소리와 청소차의 초록 색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수동적인 청각은 들여오는 소음을 막을 길 없어 고통스러웠다. 이것도 하나의 풍경일텐데..일상을 벗어난 나의 여행에 갑자기 쓰레기와 먹고 사는 문제 등이 뒤얽힌 일상의 이미지가 훅 들어오니 거슬렸던 것이다. 나는 왼쪽 골목으로 무작정 방향을 틀었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도시, 어디로 가나 어딘가에선 다시 베토벤 생가도 나오고 우체국도 있는 뮌스터 광장 쪽으로 가지 않겠나...판도라의 상자는 닫혔고 희망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세종로에서 을지로, 저 멀리 사직동 사방팔방 걸어 다니던 나의 발걸음은 여기서도 그다지 빨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아는 어딘가가 나올 거야~ 뵌쉬 한잔에 달궈진 여유는 가랑비 내리는 날씨에 더 느려졌고 청소차가 안 보인다는 거 하나에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참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각들! 그때 독일에서 보기 힘든 신비한 것들이 내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마시대의 흔적? 아주 오래된 작은 석탑, 기념비 그리고 식수 탑 들~



역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 오래된 돌조각들! 본 구도시 한적한 골목길 '헤어슈트라세 Heerstrasse'에서 B.C. 3세기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고대 로마의 신 주피터를 만날 줄이야! '주피터 기둥'한 쪽에는 주피터가, 그 반대 편에는 Juno, Minerva, Merkur의 상을 새겨 넣어 찾는 재미도 컸다. 제우스가 아니고 주피터로 표기된 것을 보니 로마 시대의 유적이구나~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멋지고 잘 다듬어진 대리석 석상과 달리 돌을 쪼아 새긴 이 신들의 모습은 원시적이고 직접적이며 친근했다.


메두사의 머리 같은 '강을 다스리는 신'의 얼굴은 공포를 자아내려는 듯 반쯤 벌어져 있었고,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은 지금 당장이라도 뱀 대가리로 변할 것만 같았다. 이 석상은 라인강의 수호신인 '레누스 비코리누스 Rhenus Bicornis'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B.C 1세기의 조각품 위로 내리는 보슬비와 낙엽들은 구도시의 운치를 더욱 달궈 놓는 것 같았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였구나! 주피터와 레누스가 나를 이 곳으로 이끈 것만 같기도 하고 이 우연한 조우가 마치 신의 예정에 있기라도 한 것 같아서 행여 신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신이 났다. 이 예상하지도 못했던 발견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 나만 알고 싶은 장소를 알아 낸 것 같은 흥분이 앞섰다. 여행할 '맛'이라면 '먹어 느끼는 맛' 말고 이런 탐색과 발견의 '맛', 그 진귀하고 오래된 녹진한 맛도 괜찮겠지?



이곳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 좀 더 깊숙히 골목길로 들어서니 본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유겐트슈틸 Jugendstil' 양식의 건물 장식이 보였다. 이 곳 1층은 정육점이었는데 사진 찍는 외국인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이며 손까지 흔들어 주셨다. 현지인 마인드였던 나는 갑자기 당혹스러워졌다. 사진기에 한복 차림의 동양인에게 보이는 관심은 분명 외국 관광객에게 보이는 호기심과 다정함이었다. 내가 정작 그들과 같은 복장, 망원렌즈 없는 맨 손일 때는 느껴보지 못한 상냥함이어서 여행할 때에는 그곳의 언어를, 그곳의 삶을 모르는 입장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 이상한 순간...


한복 디자이너로서 다시 찾은 독일은 참 친절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참 소극적인 독일인들이 심지어 말을 걸기도 하고, 아름답다고 서서 말도 해주고, 성의껏 길을 가르켜 주기도 하고,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였는지...그들의 친절한 악센트 강한 영어는 세상 아름답게 들렸다.


그래... 여행자라서, 오늘은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 포획자여서, 그래서 이곳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지도 몰라~


이렇게 보슬비와 친절함에 젖은 채 나의 발걸음은 공원묘지를 향했다...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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