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프렌치 리비에라.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지중해 해안가를 일컫는 말로 '코트 다쥐르(Côte d'Azur)'라고도 불린다. Côte d'Azur의 '아주르'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아주리 군단에서 들어 본 적이 있듯 푸른색을 뜻하며, 손에 뚝뚝 묻어 나올 것만 같은 지중해 연안의 푸른 바다를 상징한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공식적인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동쪽으로는 이탈리아 국경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쌩 트로페즈(Saint-Tropez), 툴롱(Toulon), 예르(Hyères), 까시(Cassis)까지를 말한다. 참고로 조금 생소하지만 프렌치 리비에라가 있듯 이탈리안 리비에라도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리비에라는 지중해에 속해있는 리구리안해를 인접한 해안가를 말하며 그 서쪽 부근을 프렌치 리비에라, 동쪽 부근을 이탈리안 리비에라고 부른다.
2007년 5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 난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 2년 반 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파리에서 일주일, 니스에서 일주일 이렇게 2주간의 일정으로. 말만 들어도 설레게 만드는 마법 같은 문장이다. '파리에서 일주일, 니스에서 일주일'. 그건 마치 '용돈 좀 보냈어. 필요한데 써', 라든지 맘에 드는 겨자색 스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오늘부터 세일 들어가요~'처럼 그냥 듣고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돌면서 발끝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드는 문장이다. 우린 12시간의 비행 끝에 드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도메스틱 항공기를 타고 또다시 1시간 반을 날아 겨우 니스에 도착했다. 중간에 몇 번 토도 한 것 같고... 둥실 떠올랐던 발이 진짜 니스의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보았다. 프렌치 리비에라를. 흔히들 말하는 남부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안가. 니스를 시작으로 위 쪽으로 올라가면 그레이스 켈리로 유명한 모나코 왕국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영화제로 유명한 깐느가 있다. 정말 정말 멋진 도시. 하지만 꿈에 그리던 니스의 해변은 자갈밭이었다.
BOULEVARD Princess GRACE de MONACO
BOULEVARD Princess GRACE de MONACO 1929 - 1982
이 표지판을 보는 순간 뭔가 내가 굉장한 곳에 와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구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와~ 대박!! 그레이스 켈리라니!!! 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난 그레이스 켈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헐리우드의 유명한 배우로 데뷔했다가 그 미모에 반해 모나코 왕자가 결혼해줍쇼, 굽신굽신, 그러다 모나코 왕비가 되었다는 그야말로 레전설 같은 얘기만 어렴풋이 알았지, 실제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국, 몬테까를로. 다 내게 실제보단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그런 단어들이다. 이름이 주는 대단한 아우라. 하지만 그 실체는 정확히 뭔지 모른다. 갑자기 나 자신이 속이 텅 빈 강정같이 느껴졌다.
숙소에 들어와 간단히 짐을 정리하다가 샴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반나절 넘게 더러운 비행기 좌석에서 뒹굴다 왔기 때문에 당장 씻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관광객 등쳐먹기 딱 좋은 한복판에 샴푸를 사러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록시땅 샴푸를 써보게 되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쓰게 된 거지만.(그나마 샴푸 비스무리한걸 파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이때부터였다. 버베나 향의 포로가 된 인생이.
내가 갔었던 그때의 니스 뒷골목은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엄청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길에 차이는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를 오가며 적당히 맘에 드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사람 구경을 하며 여행 계획을 짰다. 아니면 그마저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쬐곤 했는데, 가끔 살면서 그때의 그 니스 골목길들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엄청 번잡하고 정신 사나웠는데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한적하고 아무 걱정 없었던 때가 없었다.
우리에게 길을 찾는 이정표가 돼주었던 버스비 호텔...
여기서 유태인 부녀가 운영하는 렌터카 업체에서 닛산 미크라 카브리오레라는 아주 귀여우면서도 쌈박한 스포츠카를 렌트했다. 일단 난 카브리오레 cabriolet라는 단어가 참 좋다. 로코코 시절에 유행했던 여자들의 모자 주름에서 연유했다는 어원도 너무 귀엽고, 또 실제 발음도 너무 스무스하게 굴러가면서 컨버터블보다 훨씬 더 있어 보이는 느낌이 나니까. 무엇보다도 여기 니스의 날씨와 참 잘 어울리는 차라고 생각했다. 렌트하고 한 30분 정도까지는... 스틱이었는데, 난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군대에서 발급해준 1종 대형 면허도 갖고 있었고. 물론 제대하고 나서 몰아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자존심 문제다. 무엇보다도 옆에 나미가 있는데 못한다고 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막상 5톤 트럭 뒷바퀴에 치어 진짜로 죽을뻔하니까 맘은 아주 쉽게 바뀌었다. 코 앞의 거리를 왕복 30여분이 걸린 끝에 다시 렌터카 업체로 돌아온 우린 하나 남은 오토로 바꾸고, 세상없는 홀가분한 얼굴로 그렇게 진짜 프렌치 리비에라를 달리기 시작했다.
우린 위로는 모나코 왕국을 거쳐 몬테까를로까지 보고 (그 이상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밑으로 달리기로 계획했다. 내륙에 있긴 했지만 영화 향수의 촬영지이기도 한 그라스를 들렀다가,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앙티브를 찍고 그 유명한 깐느를 거쳐 쌩 트로페즈를 가는 것으로 루트를 정했다. 이것이 우리가 니스의 뒷골목에서 짠 드라이브 루트. 쌩 트로페즈를 반드시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친한 파리지엥 후배 때문이었다. 쌩 트로페즈는 꼭 가봐야 한다고. 니스에 온 이상, 아니 프랑스에 여행 온 이상 쌩 트로페즈는 반드시 가봐야 하는 아름다운 바닷가라며 극찬을 했다. 아니 극찬은 안 했나? 모르겠다. ㅎㅎㅎ 기억이란 건 항상 모호하다. 어쨌든 우리에겐 그렇게 들렸다. 한 번쯤 꼭 가봐야 하는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그래서 우린 오케이! 못 갈 것도 없지. 가자 쌩 트로페즈로!! 를 외쳤다.
오션스 13 포스터가 곳곳에 걸린 걸 보고 우리가 깐느에 와 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린 한국에 오고 나서야 전도연이 깐느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결이가 슬쩍 한마디 했던걸 굳게 믿고ㅡ우린 니스에서 깐느를 거쳐 쌩 트로페즈까지 갔다. 정말 환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란 기대심을 양손에 잔뜩 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린 깨달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영어는 쥐뿔 못 알아먹는 남 프랑스 구석탱이의 해변을 '내비게이션 없는' 차로 몰아 찾아간다는 행위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말이다.(지금 생각해보면 내비 하나만 있었다면 너무나도 간단하고 단순한 길 찾기가 되었을 것인데, 물리적으로 10년 전이라는 시차가 존재하는 이 글에선 그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았습니다.) 물론 알리앙스 다녔던 소싯적 불어 실력 하나 믿고 까불었지만 운전 내내 내 입에서 나왔던 단어는 딱 두 개뿐이었다. 아 구쉬 a gauche(왼쪽), 아 드로와 a droite(오른쪽). 그리고 우린, 대략 출발한 지 5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그놈의 쌩트로페즈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
.
.
.
.
.
너무 늦게 도착했는지 모든 해변이 전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실망스러웠던 것은 해변이 문을 닫아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쌩 트로페즈에서 보았던 것은 그토록 기대하고 상상해오던, 그런 어떤 아름다운 해변의 이데아랄까? 그런 게 아니었다. 니스나 깐느에서 보았던 해변보다는 좀 낫긴 했다. 어쨌든 여긴 돌멩이는 없으니까. 약간 더 프라이빗하고 아주 조용~ 한(이것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죠.) 그런 해변... 그러나 사실 이와 비슷한 해변은 동남아 리조트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해변은 얼마든지 많다.(여기까지 인정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 없이 많은 길을 헤매고 말도 안 통하는 힘든 드라이브를 하면서도 그래도 이 길 끝에는 지상 낙원 같은 멋진 해변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기대 하나로 참고 인내하며 달렸었는데. 정말 너무너무 허탈했던 순간이었다... 허무함에 지쳐 해변에 나뒹굴고 있는데,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간 웃기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쫓고 있는 행복이란 정말 이런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갑자기 급 교훈 모드 ㅋㅋㅋ) 행복은 골인 지점에 행복이라고 쓰여 있는 복 주머니가 떡 하고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 주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정작 쌩 트로페즈라는 해변보다는 그곳에 도달하는 그 과정에서 훨씬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몇 시간의 운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었으니까..(사실 막판엔 좀 싸웠습니다. 아시죠? 도착 바로 직전엔 언제나 대판 한다는 걸). 마지막으로 그곳에 도달했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는지... 신기루를 쫓던 기분이 들었다. 그 행복이란 것이 나의 두 손과 머릿속에 있다는 걸 몰랐다... 문 닫은 해안가를 나오는데 씁쓸하면서도 미묘한 미소가 절로 돌았다. 나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달까.. 그냥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P
그렇게 우린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남은 일정을 위해 열심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가는 길은 금방입니다. 힘든 건 항상 첫 발을 내딛을 때, 그러나 그때가 제일 재밌고 행복합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