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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dolee Jun 28. 2018

나에게 무엇을,
달리냐고 물었다.

달리지 않기엔 여전히 우리는 젊다 (3/6)


 장비가 필요한 취미에서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장비에 집착하거나 장비를 사기 위해서 과소비하는 사람.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흔히 '장비병에 걸렸다'라고 말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장비병'이라는 단어가 비꼬는 의미로 사용된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워낙 많이 사용해서인지 '장비 욕심이 많은 사람' 정도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한 듯하다.


 이러한 장비 욕심은 러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어떻게 달리기가 취미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일 수 있다. 1년 전 내가 러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냥 적당한 운동화, 적당한 운동복만 있으면 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장비병에 걸렸고, 장비를 통하여 더 나은 러닝을 경험했기에 이 신문물들을 만나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글은 그 신문물들에 대한 공기 반, 찬양 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오늘은 그 신문물 중 딱 한 가지만 찬양해볼까 한다.


힌트: 둘 중 하나


귀에 그거 뭐예요?


 "이거요? 콩나물 대가리(♩)요."

 중학교에 다니는 3년 내내 나의 평균 성적을 깎는 한 과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음악'.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도 악보를 읽지 못한다. '4분 음표와 8분 음표가 어떻게 다른지 알 게 뭐야?' 하지만 당시에는 알아야 했다. 10년 전 나는 '음악'이란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시험 기간만 되면 늘 악보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엄마와 아빠는 이런 말씀을 나누셨다. 저놈의 콩나물 대가리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 후로 악보 위에 널린 음표를 볼 때면 늘 떠오른다. 콩나물 '머리'도 아닌 콩나물 '대가리'가.


 그런데 살다 보니 콩나물 대가리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귀에 꽂는 콩나물 대가리라 불리는 '에어팟'이다. 일상 속 에어팟의 장단점은 이미 수많은 간증 글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나는 러닝할 때의 에어팟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2017년 6월 13일, 러닝을 시작한 지 (달랑) 2주 만에 에어팟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예전부터 갖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내 뽐뿌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온전히 러닝이었다. 달릴 때 음악을 듣는 나에게 선이 주렁주렁 달린 기존의 애플 번들 이어폰은 너무 불편했기에 선택지는 딱 하나로 좁혀졌다. 선이 없는 블루투스 이어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어팟'을 살 것. 이유는 묻지 말자. 자꾸 그러면 '앱등앱등' 하며 울 수도 있다.


얼이 형에게 선물 받은 암밴드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는 조합


 슬프게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에어팟을 편하고 저렴하게 살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물량이 부족했던 터라 애플스토어에서 에어팟을 사기 위해서는 무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견뎌야 했으며, 중고로운 평화나라의 팔이피플들은 이때다 싶어 프리미엄 가격으로 물건을 올려놓을 때였다. 그러다 내 눈에 띈 강 같은 글 하나. 몽촌토성역 직거래로 무려 정가에 팔겠다는 판매자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누군가의 말, 솔직히 믿을 뻔했다.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나에게 돈까지 빌려 가며 몽촌토성역으로 달려갔다. 내 인생의 첫 중고거래가 직거래로 무려 21만 9천 원짜리 에어팟이라니! 아마 쫄보 인생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가계부에 적어놓은 역사적인 날. 천 원은 웃돈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 물건이 간절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이 없는 자유는 평소에도 느낄 수 있지만, 러닝할 때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땀으로 젖은 얼굴에 이어폰 선이 붙어 짜증 낼 일도 없고,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눈앞에 선이 출렁거려 거슬릴 일도 없다. 다음은 러닝할 때 에어팟을 착용한다고 말하면 누구나 겪게 되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이다.


 "뛸 때 귀에서 안 빠져요?"

 "애플 번들 이어폰이 귀에 잘 맞는 사람이면 헤드뱅잉을 해도 안 빠져요. 직접 실험도 해봤어요."

 "그래도 떨어뜨릴까 봐 걱정되지 않아요? 예를 들면 맨홀이나, 맨홀이나, 맨홀 같은 곳에."

 "제가 원래 맨홀을 피해서 뛰는 편이라 그런 걱정은 아직.."

 "아무리 봐도 선이 없어서 쉽게 잃어버릴 것 같은데요?"

 "가격 생각하면 제 몸보다 더 챙기게 되더라고요. 술에 취해도 에어팟은 챙기는 사람이 접니다."


 근데 정말 그렇다. 내가 작년에 산 물건 중 가장 잘 산 물건 1위가 에어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에어팟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이런 고민을 1초나 더 했다는 자신에게 화날 수 있으니 당장 지르세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나마 잘난 에어팟에 흠을 조금 내보자면 콩나물 대가리美 넘치는 디자인. 하지만 이마저도 상쇄시키는 장점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추천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처럼 취미로 뛰는 사람에게는.


 지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121번의 러닝으로 643.3km를 달렸지만, 아직 달리다가 에어팟의 배터리가 다 닳아본 적이 없기에 잊지 말자. 달리지 않기엔 여전히 우리는 젊다.




달리지 않기엔 여전히 우리는 젊다

나에게 왜, 달리냐고 물었다.

나에게 어떻게, 달리냐고 물었다.

나에게 무엇을, 달리냐고 물었다. (현재글)

나에게 어디서, 달리냐고 물었다.

나에게 언제, 달리냐고 물었다.

나에게 누가, 달리냐고 물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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