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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14. 2021

나는 돌이 아니라는 선언의 의미

돌의 물성을 박현기의 작품 속에서 재사유하기


  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돌탑을 만나게 됩니다. 적당한 돌을 찾아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쌓으며 소원을 빌었던 마음들이 아름다워, 그런 탑들을 지날 때마다 중얼거리게 돼요. 이들의 염원을 보살펴 달라고요. 아, 저는 돌탑에 얹고 싶은 소원이 없냐구요? 당연히 많죠. 그치만 저는 저의 서툰 기술로  탑의 균형이 흔들리고 이전의 기도들이 물거품이 될까 봐 차마 못하는 편이예요. 해코지만 없다면 돌탑은 오래도록 그 길에서 타인의 마음, 나의 마음 속을 헤아리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겠죠. 꽃이나 나무, 흙 같은 요소가 아니라 돌에게 우리의 기도를 투영하는 이유는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물성 때문일 거예요. 




<무제>(1978/2015)의 돌탑과 <무제>(1988/2021)의 TV-돌탑 


 

  박현기의 <I’m Not a Stone>은 이런 돌의 물성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던 전시였어요. 갤러리 현대에서 마련한 회고전에는 1970-80년대 돌을 활용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에도 돌탑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무제>라는 작품명의 이 돌탑 중 어떤 돌들은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어요. 작가가 레진으로 만든 인공돌이지요. 조금은 튀지만 위화감 없이 포개진 이 돌들을 보며 질문하게 됩니다. 만약 인공돌이 더 그럴듯하게 위장했다면 구분해낼 수 있었을까? 같은 작품명의 TV-돌탑도 그래요. 작가는 돌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화면의 TV모니터로 거대한 돌탑을 쌓아 올리죠. 이미지만 본다면 영락없이 돌이 쌓여있는 모습의 작품에서 작가의 질문은 더 날카로워 집니다. 돌은 무엇이죠? 무엇이 자연의 돌이고 인공적인 돌을 만듭니까? 우리는 실재와 허상을, 진짜와 가짜를 깔끔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설치 작품 <무제>(1983/2015)와 1983년 빈 화랑에서 벌인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영상인  <무제> (1983) 중 일부. 

 


  지하 1층 전시공간의 돌들은 마치 군상처럼 모여 있습니다. 중앙에 걸린 마이크를 향해 저마다 무언가 호소를 하려는 듯 말예요. 작가가 1983년 전시를 앞두고 채집한 소리가 곁에 놓이면서 이 전시공간이 지닌 시간성은 더 다층적이 됩니다. 2021년의 현재와 녹화된 소리의 1983년의 시간, 그리고 돌이 담지한 유구한 시간들이 함께 존재하는 거죠. 이 작품은 작가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과도 연결됩니다. 83년 전시에서 박현기는 등에 ‘I’m not a stone’ 문구를 새기고 나체로 돌무더기를 활보합니다. 돌 사이나 돌 위를 겅중겅중 걸어다니고 돌처럼 웅크리기도 하면서- 무수한 움직임 속 작가는 때론 몇 겹의 실루엣으로, 희미한 흔적처럼 사진에 남겨집니다. 그에 반해 바닥의 돌들은 어떤 프레임에서건 선명한 형체로 본래의 자리에 고정되어 있죠. 여기서 인간의 몸과 움직임은 돌의 물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박현기의 ‘나는 돌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돌과 인간의 경계를 구분 짓기 위함일까요? 퍼포먼스만 보았다면 오해할지 몰라도, 그의 전 작품을 함께 놓고 본다면 그리 단순하게 해석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인간 몸과 돌의 물성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작가는 그 차이간의 우위를 두지 않습니다. 인간이 돌의 불변성을 신성하게 추앙하다가도 반대로 우둔함의 상징으로 얕잡으며 인간의 우월함을 구성해왔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 태도이죠. 박현기의 작품들 모두가 돌이 군집을 이룬 형태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의 물성을 토대로 한 이우환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확연하죠) 돌과 돌이 아닌 것의 경계는 그 관계의 맥락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선명해지거나 모호해져요. 하지만 집단 안에서 각각이 가진 본질적인 차이는 그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주황빛 인공돌이나 TV 영상이 섞여도 그들이 이룬 돌탑은 돌탑으로 기능하지요. 어쩌면 작가는 인간을 규정하는 공동체의 범주를 인간-아닌 것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작가의 나, 인간은 돌이 아니라는 선언은 나를 규정하는 데 있어 돌을 밀어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아닌 돌을 포함하는 관계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인간이라서 우월하거나 또는 돌이라서 우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인 차이를 지닌 채 공존하는 우리라는 세계. 박현기 작가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균형있게 포개어져 공동의 탑-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꾸었던 건 아닐까요. 길가의 돌탑을 어여쁘게 여기는 마음처럼! 




*이 글은 2021.4.21-5.30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박현기 회고전 <I'm Not a Stone>을 관람하고 (아주 늦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전시 설명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작가 설명과 작품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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