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동안의 동생과의 짧은 동거
아직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거실로 비틀비틀 걸어나왔을 때 문득 집이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어제 집안을 쓸고 닦았습니다. 분리수거통도 두번에 걸쳐 비웠구요, 종량제 쓰레기도 버려야 했죠. 부엌 테이블에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전기포트의 물을 끓이고 원두를 꺼냅니다. 그러다 작은 방의 반쯤 열려있는 문틈에 시선을 두게 됐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 저의 공간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던 근본적인 이유는 청소로 깔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요. 실은 허전함이었어요. 작은 방에서 지내던 동생이 다시 미국으로 떠났거든요. 어제까지만 해도 거실에 놓여있던 동생의 짐가방과 함께요.
세살 터울의 여동생은 미국에서 공부 중입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한지 2년 정도 됐죠. 출국할 때만 해도 박사를 졸업하고 취업 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동생도 코로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미국은 코로나와 인종혐오 범죄, 그에 대한 반시위가 겹쳐져 있었잖아요. 감염병과 폭력이라는 이중의 위협은 외국 학생의 불완전한 신분에 있어서는 더욱 치명적이었고, 칩거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동생은 언제부턴가 말하기 시작했어요. 방학동안 짧게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요. 위험한 시국에 반드시 한국에 와야 할 명분은 없었지만, 한국에 있는 소박한 것들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가족, 친구, 음식 같은 것들이요.
동생은 미국에서 백신 접종을 이미 마쳤지만, 한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에 입국해서도 2주의 자가격리를 해야 했습니다(7월부터는 이 방침이 일부 변경됐죠!). 짧은 여행기간의 절반을 격리 되어야하는 상황을 못내 속상해하면서도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오겠다는 마음이 절박하게 느껴졌어요. 입국 준비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생은 부모님이 계신 제주에서 자가격리를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인천 입국 후 비행기 연결편을 예약하는 것부터 격리공간을 구하고 이동하는 것까지- 동생이 한국행을 준비하면서 격리가 해제될 동안 빈번히 가족의 도움이 필요했거든요. 이 과정을 겪으며 한국행을 감히 결정하지 못하는 해외 거주민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비용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급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이 한국에 없다면 겪을 문제가 너무 많아 보였어요. 우리가 겪는 곤란은 열악한 위치의 제곱수 같습니다.
동생의 방문으로 깨달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예요. 격리가 끝난 후 동생은 서울에 올라와 저와 함께 지냈는데요,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일회용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나(동생은 한국 와서 먹고 싶다던 메뉴들을 거의 배달로 섭렵했어요), 최소주문금액이나 메뉴구성 때문에 양조절이 쉽지 않다는 점, 고칼로리의 메뉴가 다수라는 점 등을 실감했죠. 평소만큼, 아니 평보보다 더 운동을 했는데도 동생과 저녁을 함께 하며 3키로가 찐 제가 산증인이 된 셈입니다.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서울은 거리두기 4단계로 돌입하고, 백신을 맞지 못한 저는 동생보다도 식당이나 카페 방문을 자제하는 처지이긴 했지만.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그 편리함이 요구하는 비용이나 자원의 과소비까지도 쉽게 합리화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상품과 서비스의 증대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안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비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는 다짐도 했고요.
온갖 메뉴와 음료를 담고 배달된 일회용품들로 꽉 찬 부엌은 새삼 한 존재가 차지하는 물리적 부피를 체감하게 해주었어요. 사실 이 집은 원래 동생과 함께 살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동생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며 이 집의 이인분의 구성은 서서히 일인분으로 변해왔죠. 아마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동생은 저를 중심으로 재배치된 공간 곳곳이 어색하고 비좁게 느껴졌을 거예요. 동생의 짐들이 동생이 썼던 작은 방에서 부엌으로, 거실로 비집고 나올 수 밖에 없었겠죠. 그치만 넘쳐난 건 물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늘상 조용했던 집에서 노래가 흘렀고, 대화가 이어졌고, 자주 웃음이 터졌어요. 네, 일상의 온기가 함께 늘어난 거예요. 혼자 지냈던 시간이 길어지면서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거주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안정이 희미해졌는데, 동생이 그걸 되살려주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말이죠. 물론 오랜만의 재회가 장밋빛 환상일 수는 없어요. 저희도 서로를 향해 끊임없는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조차도 소소한 재미로 여겨졌죠. 애정과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말들이었으니까요.
인천공항에서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헛헛했습니다. 오글거리는 건 둘다 싫어하고 꽤나 쿨-한 자매라 마지막 헤어지면서도 ‘일직 결혼하는 사람 결혼식에서 만나자!’라는 말로 웃으며 헤어졌지만 말이예요. 집으로 돌아와서 동생이 남긴 짐과 흔적들을 치우고 다시 저만의 공간으로 되돌려놓는 노력을 기울여놓고도 다음날 아침 까맣게 잊어버린 걸 보면 아마도 아직은 동생과 함께 였던 시간이 더 좋은가 봅니다. 동생이 선물로 준 원두로 커피를 내리며 그 향으로 동생의 부재를 채워봅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우리는 안전하고 또 여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