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Aug 31. 2021

선, 그 다양한 변주들

드로잉의 날것의 선부터 머리카락의 물성을 가진 선까지

*여름에 보았단 많은 전시들을 짧게나마 기록해보려는 시도입니다. 둔탁한 몇 문장으로도 쓰지 않으면 영 남지 않더라구요. 


1. 

2017.4.4 방문했던 서촌 온갤러리의 <존 버거의 스케치북> 전시


 저는 드로잉을 좋아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로잉의 날 것의 선, 거칠고 직관적인 그 선을 좋아합니다. 드로잉은 작품의 밑그림, 그러니까 기초적인 스케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많죠. 하지만 작품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현시한다는 점에서 드로잉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은 없는 것 같아요. 그 자체만으로 온전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가치도 충분하다고 여겨지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존 버거도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드로잉을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린다고 말했답니다. 화가를 꿈꿨던 존 버거는 미술평론가와 소설가이자 작가로 전향하지만, 꾸준히 드로잉을 그려왔어요. 그의 여러 저서에는 이 드로잉들이 표지로, 삽화로 등장하구요. 2017년 존 버거가 서거하고 서촌 온그라운드갤러리에서는 <존 버거의 스케치북>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어요. 소박한 전시 공간에서 오리지널 드로잉 작품 60여점을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던 기억은 여전히 따뜻한 마음의 온도를 떠올리게 해요. 그때 생각했거든요. 위대한 철학자이고 사상가인 그가 첨예하게 느꼈을 언어의 한계-언어로 세계와 대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할 때 맞딱들이게 되는 빈틈- 속에서 종종 그는 언어 대신 드로잉의 선으로 세계를 말하려 했구나, 하고요.    




2.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의 <드로잉 소장품>전(상시)은 존 버거나 르 코르뷔지의 드로잉을 볼때처럼 설렜습니다. 드로잉은 보관이 까다롭기 때문에 청주 국현은 특별수장고 일부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해 매시각 10명의 한정된 인원만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약시스템은 별도로 없고 관람이 시작되는 정시 전에 눈치껏 줄을 서야 해요. 10인에 든 관람객은 수장고의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후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약 800점 정도의 소장품 중에는 한국근현대미술의 거장들의 드로잉이 있습니다. 유영국의 산이나, 김환기의 새, 박수근과 박현기의 스케치, 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고요. 작품이 압도적인 감동을 준다면 드로잉은 작가와 친밀감을 형성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날 것의 생생한 드로잉의 선은 마치 관람객 뿐만 아니라 어떤 타자도 의식하지 않은 내적 고백의 흔적 같아 보이거든요. 캔버스에 펼쳐질, 한 세계를 잉태한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흥분도 있구요. 





3.

 

반면 갤러리현대 <몽유>전(2021.6.16-8.1)에서 본 이강소 작가의 선은 힘과 힘의 방향성, 그 자체였습니다. 구부러지고 꺾였다가 뻗어나가는 붓질. 이 세계에 작동하는 힘들이 그 선으로 형태를 얻은 것처럼 보였죠. 이강소 작가는 세계의 근원은 생동하는 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눈으로 포착할 수 없지만 에너지들의 파동으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해가죠. 이 기를 이미지로 전환하되, 기의 특성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도록 추상적이면서 역동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거예요. 작가는 붓질을 미리 구상하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인 몰입과 집중으로 주변의 기운에 손을 내맡기는 거죠. 하이얀 캔버스에 검은 먹의 붓은 일필휘지로 혼연일체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모든 작품의 선들은 계속해서 힘을 갖고 바깥으로 뻗어나갈 것 같은 힘으로 느껴졌어요. 바라보는 저에게도 화폭의 경계를 넘어 힘을 전이시키는 것 같은 생명력.   





4. 



아, 그리고 한동안 제가 헤어나오지 못한 또 다른 선이 있었습니다. 광부작가라고 불리는 황재현 작가의 <회천回天>전시(2021.4.30-8.22)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습니다. 1980년 민중미술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척박한 광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광부로 일하면서 당시 노동의 고됨과 부조리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작품들을 남기죠. 이후 쇠락한 폐광촌의 풍경을 다루다 2010년 이후에는 더욱 보편적이면서 동시대적인 이슈로 관심사를 확장시키며 머리카락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게 됩니다. 작가는 머리카락의 물성에 대해 "머리카락은 개개인의 삶이 기록된 필름과 같고, 그리하여 올곧은 정신성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새벽에 홀로 깨어>는 머리카락에의 선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윤곽을 더하고 부피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몸 밖으로 비탄과 절규가 새어나와요. 또한 그것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엉킬대로 엉켜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어디가 경계인지 막막해집니다. 분명 보이지 않을 감정들이 뚜렷한 부피로 보여져서, 한동안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고 제 것이 아니었던 슬픔이 제 것이 되었었습니다. 이 작품은 세월호 유족을 그린 그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오래 수영하고 잠수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