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탈시설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공연 <관람모드-있는 방식>
(이어서)
<관람모드-있는 방식>으로 향유의 집에 오기 전에 나는 이미 이 곳을 만난 적 있었다. 내가 꾸준히 후원하고 있는 닷페이스에서 지난해 여름에 탈시설에 관련된 기획 보도를 했다. 장애인이 시설에 격리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프로젝트였다. 그곳에서 향유의 집 사례가 소개됐었다. <한 때는 120명 넘는 장애인들이 살았던 곳>이란 영상을 통해 나는 향유의 집 안을 힐끔 거릴 수 있었다. 향유의 집을 운영했던 프리웰재단 이사장과 20년 가까이 향유의 집에서 거주했고 지금은 자립해 '푸리덤'을 외치는 호영선, 중증장애 아들을 시설에 보냈던 어머니의 인터뷰가 폐지된 시설의 풍경과 교차된다.
인터뷰 중 '시설병'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재단 이사장 김정하는 이 증후군을 장애인이 '장기간 사회와 단절되어 시설에 갇힌 상태로 살아가면서 겪는 무기력함과 희망 없음'의 증상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삶 자체의 의욕을 시들게 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장애인보다 시설의 운영진과 직원들이 이 증후군을 앓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덧붙인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이들은 '시설병'이라는 증후군에 시달리기보다 '이 병에 전염된 시각'을 가지는 것일 테다. 장애인은 무능력하므로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없다는 냉소적인 편견. 시설은 이런 편견에 기반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왔다. 향유의 집 곳곳에는 '누구'를 중심으로 이 공간이 운영되어 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이 많다. 두 방 사이에 문 두개가 달린 공동 화장실이 대표적이다. 말썽을 일으킨 거주인을 가두는 독방이나 통행을 막았던 복도의 차단벽도 그렇다. 많은 인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이 고안됐다고 한다. 자꾸 손을 빠는 이에게 그걸 닦아주기보단 팔을 못 들어올리는 장치를 달았더라고 어머니는 회상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가 이미 장애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시설병'에 전염되어 있다. 이 뿌리깊은 편견 앞에서 장애인들은 이미 그런 존재로 놓여 있다.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채. 방 구석이나 복도 한 켠에 주저 앉아 가장 먼 벽지만 온종일 바라봤던 향유의 집 거주인들처럼.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을 나는 국회가 아닌 감독으로 먼저 만났다. 그녀는 18년간 시설에서 지내온 발달장애 동생을 데리고 나온다. 동생과 단둘이 살기 시작하며 겪는 고군분투를 기록한 뒤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와 동명의 책을 선보였다. (꼭 한번 글을 쓰고 싶다) 다큐를 보면 함께 분노하고 황망해지거나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시간도 있지만 명랑한 웃음과 안도감, 소중한 행복이 밀려오는 시간도 함께 있다. 다큐에서는 국민연금공단에서의 '활동보조지원 등급심사' 과정이 나오는데, 심사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어안이 벙벙하다. 장애 당사자에게 필요한 활동보조지원 정도를 판단하는데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성격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건 질문이 일방적으로 '보호자'에게 쏠려있을 뿐, 장애당사자는 애초에 대화의 상대자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장애에 대한 제도적 접근 자체가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필요한 것은 '심사'가 아니라 심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논의'와 '대화'여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활동보조서비스 심사는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심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심사가 아니라 논의와 대화이다. 현재의 제도에서 장애당사자는 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해있다. 만일 심사의 목적이 한정된 자원을 잘 분배하여 장애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심사는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고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필요한 것은 대화의 형식이다. 왜 장애당사자가 무엇을 얼마만큼 필요로 하는지 직접 말하게 하지 않는가? 왜 당사자가 자기 자신을 더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질문을 고안하지 않는가? 장애인의 삶이야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이므로 몇 가지 ‘전문적인’ 질문들만 던지면 그 사람에게 적합한 지원서비스의 명세가 마법처럼 인쇄되어 나온단 말인가. 아닐 말씀이다.
그 날 나와 동생에게 쏟아졌던 많은 질문은 막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닫힌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늘 열려있다. 불확실한 미래와 열린 질문들은 때로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다. 우리가 모든 중증 장애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24시간동안 활동보조서비스를 당연히 제공받을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그런 곳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일단 관점을 바꾸자. 한 시간을 주더라도 열린 시간을 주라. 전기밥솥으로 밥 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더 인간다운 삶을 꿈꿀 시간을 주라.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95)
공연동안 관람객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신 김동림은 향유의 집 거주인이었다. 향유의 집에서 그는 단 몇분만이라도 웃음과 낭만을 되찾고 싶어 자청해서 DJ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주셨던 것!) '마로니에 투쟁' 이후 시설은 보다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설은 아무리 좋아도 시설일 뿐이예요." 김정하도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한다. 처음에는 좋은 시설, 훌륭한 운영진을 만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설이란 구조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권침해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오직 시설을 없애는 것 뿐이었다고. 그래서 탈시설을 외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김동림은 시설에서 나와 현재 지원주택에서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일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그는 지금의 삶이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의 단단함이 차갑게 식은 향유의 집 안 공기를 순식간에 데웠다. 수많은 어려움과 곤경이 있겠지만 적어도 삶의 주인으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는 확신. 그에게서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번 들어선 순간, 결코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공간들이 있다. 시설이 그런 곳이다. 그러니 어떻게 탈시설을 외치지 않을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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