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다시 생각해본 건강의 의미
두통은 오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약간 거슬리는 정도였다. 따뜻한 물로 오래 샤워를 했다. 몸은 그동안 푹 익었다. 욕실에서 언제까지고 머물고 싶어하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나오니 다시 두통이 느껴졌다. 이번엔 더 강하게. 관자놀이를 옥죄는 무게와 압력이 턱 밑까지 우왁스럽게 끌어당겼다. 목이 건조하고 열이 오르는 건 친구들의 말마따나 기분탓일까. 의심되는 날 함께 밥을 먹었던 친구들은 나보다 하루 일찍 검사를 받았고 모두 음성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나도 기대를 가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집요하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입맛이 없어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와인을 마셨다. 천천히 와인을 넘기는 입 안이 헤진게 느껴졌다. 목 안의 꺼끌거림이나 안구에 느껴지는 압력이 아무래도 몸 안의 열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26도로 설정한 난방으로 숙소 안은 훈훈해졌지만 나는 챙겨온 옷들을 모두 껴입은 것도 모자라 이불 두장을 겹쳐 덮었다.
지옥은 밤에 있었다. 베개에 뉘인 머리는 반으로 쪼개질 것처럼 조여왔다. 바닥에 납작하게 누워있어도 지하 저 밑으로 머리가 처박히는 느낌.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일조차 괴로웠다. 고열과 함께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고 온몸 이곳저곳에는 둔탁한 통증이 계속됐다. 내겐 상비약이나 그 흔한 진통제 하나 없었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긴 밤을, 푸르스름한 새벽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동녘의 희미한 빛이 어둠을 서서히 몰아내는 시간동안 뜬눈으로 나는 예감했던 것 같다. 내가 겪는 이 기이한 아픔을 설명할 병명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그래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지독한 독감 같은건 아닐까, 희망 비슷한 것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아침 9시 13분, 보건소에서 걸려온 전화는 그것을 무참히 깼다. 음력 1월 1일, 설날 아침. 원래대로라면 엄마의 떡국을 떠먹고 있었을 시간, 나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막상 판정 결과를 통보받고 갖가지 행정 안내를 받을 때는 덤덤했다. 이미 몸이 내게 일러줬기 때문이다. 오래 운동을 해온 덕분에 나는 체력도 나쁘지 않고 잔병치레도 거의 없다. 여자에게는 흔하다는 만성두통이나 생리통에 시달려본 지도 오래고, 자가치유를 믿는 편이라 아파도 약은 가급적 복용을 꺼린다. 백신을 맞고서도 타이레놀 한 알 먹지 않았던 나다. 그런 내가 재택치료 대신 생활치료센터 입소를 요청했다는 건 정말 끔찍하게 아팠기 때문이었다. 오전 중에 이송차량이 도착할거라 알려주는 담당자에게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청했다. 두통이 너무 심해 움직이질 못하고 있으니 진통제만이라도 먼저 보내주면 안되느냐고. 절박한 내게 돌아오는 답변이란 불가능하니 조금만 더 버텨보라는 말 뿐이었다. 그런 나를 살린건 이모였다. 나와 밀접접촉자이기도 한 이모는 검사를 받으러 보건소에 가는 길에 진통제 한 통을 숙소 문 앞에 놔두고 가셨다. 그 두 알을 삼키고 나서야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입소를 위해 다시 짐을 싸야했다. 음식은 반입할 수 없고 퇴소할 때 소지품의 대부분은 폐기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챙길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제주도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하고 방을 배정받자마자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일어나보니 못해도 4시간은 내리 잔 것 같았다. 센터 의료진 부재중 전화가 5통. 체온은 39도에 육박했고 두통은 여전히 심했다. 고열이 계속 유지되면 병원으로 옮겨야하기 때문에 초기 증상을 관찰하기 위해 의료진은 해열제를 잘 허락하지 않았다. 입소하고 3일은 몇시간마다 체온을 재 보고하고, 너무 괴로우니 진통제라도 먹으면 안되냐고 빌고 (그래서 나는 의료진의 연락처를 '구세주님'으로 저장했다) 약을 먹으면 겨우 잠에 들었다가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한동안은 낮밤이 아니라 통증의 유무로 구분되는 시간을 살았다. 병실을 함께 쓰는 친구는 무증상 확진자라 끙끙 앓는 아픔이 더 괴롭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 몸은 끝까지 잘 싸워줬다. 사흘만에 열은 37도로 내려왔고 어느새 이 정도 체온에 견딜만 하다고 느끼게 된 스스로가 신기했다. 열이 내리자 두통도 가셨다. 관자놀이의 압박에 늘 조심스러웠던 몸의 움직임과 찌뿌린 미간도 겨우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이런 극심한 통증은 오랜만이라 그동안 내 몸과 평화롭게 공존해왔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코로나는 전파력과 감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이고 치명율이 낮은 변이들이 계속해서 대유행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음성과 양성을 건강한 자와 건강하지 않은 자로 단순하게 가르기기는 애매하다. 이젠 코로나를 계절독감처럼 관리하려는 논의도 시작됐으니까. 이 질병이 앞으로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 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이번 감염은 내게 건강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건강에 대해서는 자신있던 나도 질병과 사고에 관해서는 똑같이 취약한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친절한 징후 따윈 없어 예측할 수 없고 순식간에 발현해 손 쓸 수도 없는 병들. 게다가 그것의 증상들은 즉각적으로 몸을 망가트리고 마음까지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을. 어찌보면 건강은 영구한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휴전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긴 생애주기 속에서 건강한 시기는 반짝하는 기적같은 순간이고, 수많은 병균과 통증, 취약함과 불운에 맞서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이 삶 그 자체라고. 나는 이제 겸허히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보니 '아프지마, 힘내'가 실은 아픈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만드는 위로의 말인지 느낀다. 아픈 사람에겐 아프지않기 위해 쥐어짤 힘 같은 게 남아있을리 없다. 고통의 한가운데 내던져있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그 안에서 의식을 잃지 않는 노력 자체가 치열한 사투이므로 아프지 말라는 말은 너무나 무용하다. 차라리 조금만 더 버텨, 라는 응원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픈 사람은 없는 힘을 어떻게든 자신 안에서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힘을 구해야한다. 내가 구세주님에게 매번 약을 구걸했듯이. 열이 올라 사경을 헤맬 때, 나는 어릴적 밤새 이마 위 젖은 수건을 갈아주던 부모님의 손길을 떠올렸다. 머리맡에는 나를 간호해줬던 수많은 기억의 실루엣들이 아른거렸다. 나는 나의 아픔을 덜어내주던 사람들과 함께 건강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통과해왔다. 통증은 홀로 앓지만 투병의 시간은 함께 감당하는 거다. '건강하다'는 확신은 나와 내 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게 힘을 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아플때 힘내, 라는 말 대신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내게 얼마나 있는지 그게 이제 나의 건강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내 사람들이 아플때 얼마나 든든한 투병의 동지가 되어줄 수 있는지 말이다. 매번 건강하라는 인사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대신 표현해왔던 내가 이젠 한마디를 더 덧붙이려 한다. 건강하면 좋겠지만, 아파도 괜찮다고. 내가 함께 할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